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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노력 귀환…제자리는 못찾아

⑮ 봉인사 부도암 사리탑 및 사리장엄구

봉인사 부도암 사리탑은 조선 광해군 12년(1620)에 조성된 왕실발원의 탑이다. 탑이 본래 세워졌던 곳은 경기도 남양주군 진건면 송릉리 봉인사로, 이곳은 광해군과의 인연이 남다른 곳이기도 하다. 사찰에 따르면, 광해군은 왕세자가 태어나자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 복과 명을 빌며 이곳에 태실(胎室)을 봉안하고 부도암에 사리탑을 세웠다. 보통 사리탑에 스님의 사리를 모시는 것과 달리 이 탑에는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했는데, 중국에서 이운해온 것이라고 한다. 또 봉인사 인근에는 광해군과 그의 생모 공빈 김씨, 형 임해군의 묘가 있어 광해군에게 있어 특별한 의미를 가진 사찰이라고 하겠다.

일제강점기 반출 오사카미술관 전시

日人 소유주 유언으로 1987년 돌아와

광해군이 세운 높이 3.08m의 사리탑은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며, 기단은 상중하 세부분으로 나눠져 있다. 기단 위에는 둥근 형태의 몸돌과 8각의 지붕돌, 길쭉한 머리장식을 얹어 놓은 형태다.

탑 몸돌 윗면의 사리공에서는 7점의 유물이 발견됐는데, 외합과 내합의 형태인 놋쇠그릇 3점, 은그릇 3점을 비롯해 사리 1과가 모셔진 수정사리병 1점이 그것이다. 놋쇠그릇 안에는 명주실과 비단, 향이 담겨져 있었고, 은그릇 밑바닥에는 광해군 12년에 봉안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는 연대가 확실한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사리탑이라고 할 수 있으나, 탑의 길쭉한 머리장식과 함께 사리합이 두세 개인 다른 것과 달리 7개나 되는 사리합이 발견된 점 등은 특이하다.

<사진> 보물 928호로 지정된 봉인사 부도암 사리탑.사진출처=문화재청

그러나 사리탑과 탑비가 일제강점기 때인 1927년 일본인들에 의하여 고베(神戶)로 반출되고, 사찰이 전소돼 폐사되면서 사리탑에 대한 기억도 사라졌다. 그러다 1979년 봉인사 재건 과정에서, 땅에 묻혀있던 풍암대사부도비가 발견돼 탑의 존재가 확인됐다. 사찰에서는 비문에 기록된 사리탑을 찾아 나섰다. 수소문 끝에, 오사카(大阪)의 천왕사(天王寺) 공원 내에 있는 오사카시립미술관 앞에 전시돼 있는 것을 알게 돼 1983년부터 당시 소유주에게 편지와 사람을 보내 탑 반환을 요청했다. 봉인사의 요청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던 소유주는 그러나 탑 반환을 유언으로 남기고 숨졌다. 이와다센소의 유언에 따라 1987년 2월 국내로 돌아왔다. 이와 함께 이와다센소가 따로 소장하고 있던 사리장엄구와 사리 반환을 함께 요청하면서 사리탑과 탑비, 사리 및 장엄구 일체가 고국으로 올 수 있었다.

이와다센소가 탑 반환을 유언으로 남긴 배경에는 1983년부터 이어져온 봉인사의 노력이 숨겨져 있다. 결국 성보를 원래 자리로 되돌려놔야 한다는 사찰의 원력 덕분에 탑은 귀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반환된 탑이 세워진 곳은 사찰이 아닌 국립중앙박물관이었다. 정부는 탑이 반환되자마자 보물로 지정해 박물관 야외전시장이기도 했던 경복궁 앞뜰에 탑을 세웠다. 봉인사는 “문화재 관리국에서는 탑의 원 소재지인 본사를 방문해 탑을 복구하는데 쓸 바닥돌과 왕세자의 태실 등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해갔다”고 회상했다. 결국 사리탑과 사리장엄구는 박물관이 소장.관리하게 되고, 신앙의 대상인 사리와 사리를 담은 유리병만 봉인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526호/ 5월23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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