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유물 흩어지고 휑한 절터만17.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 |
창원 봉림사는 통일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하나인 봉림산문의 개창지이다. 심희(審希, 854~923)스님은 진성여왕 8년(894) 이곳에 산문을 열고 선풍을 진작했다. 신라 민애왕에서 고려 광종 대에 이르기까지 번성하던 사찰은 조선시대에 들어 폐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오랫동안 농지로 쓰이다가 근래 들어 경남기념물 제127호로 지정됐다. 성보들 일제강점기 때 뿔뿔이 사라져 95년 와편 등 발굴 불구 복원 미지수 봉림사를 대표하는 유물로는 보물 362호와 보물 363호인 진경대사보월능공탑.탑비, 경남유형문화재 26호 삼층석탑이 있다. 이들 유물들은 모두 일제강점기 때 뿔뿔이 흩어졌으며, 현재 사찰터에는 표지석만 서 있다. 이 가운데 진경대사보월능공탑과 탑비는 심희스님을 기리며 세운 것이다. 1919년 반출돼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현재 탑과 비는 모두 국가소유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심희스님의 시호는 진경이며, 탑호는 보월능공이다.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선승인 심희스님은 경문왕 12년(872)에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제방을 다니며 수행하던 스님은 진례성제군사 김율희의 지원을 받아 봉림사를 창건했다. 이후 스님은 경명왕 2년(918)에 왕으로부터 법응대사(法膺大師)라는 호를 받고 후학들을 제접했으며, 경명왕 7년(923) 봉림사에서 열반에 들었다. <사진>보물 362호 진경대사보월능공탑. 스님의 사리를 봉안한 탑은 스님이 입적한 이듬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형적인 8각의 부도로, 기단을 보면 8각의 아래받침돌 옆면에는 코끼리 눈 모양의 안상(眼象) 새겨져 있다. 북모양의 가운데 받침돌에는 띠로 연결된 꽃문양이, 또 윗받침돌에는 8송이의 연꽃이 조각됐다. 8각의 탑신에는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으며, 높고 큰 지붕돌 끝에는 꽃장식이 있었으나 모두 부서졌다. 또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비문을 지은 사람은 경문왕이고, 행기스님이 쓴 글씨를 성휴스님이 새겼다고 한다. 비 몸돌의 상단부나 이수에 비의 명칭을 새긴 제액은 최치원의 동생인 최인연의 것이다. 또 다른 성보인 삼층석탑은 창원 상북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다. 일제 때 부산으로 팔려갔다 다시 돌아와 창원교육청에 세워졌었는데 1960년 관리문제가 불거지면서 상북초등학교로 이전됐다. 높이 2.7m의 탑은 고려 초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여러 차례의 이전을 겪으면서 많은 부분이 훼손됐다. 폐사된 후 남아 있던 문화재까지 모두 반출돼 옛 흔적을 찾을 수 없었던 봉림사터는 이후 개인소유가 돼 농지로 사용됐었다. 그러다 1960년대 들어 조계종 원로의원 도문스님이 ‘가야불교초전법륜성지’ 복원을 위해 이곳 사지와 봉림동에서 산문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전답 등 1만3200㎡(4000여 평)을 매입함에 따라, 개발 위험에서 벗어났다. 이어 1995년부터 4년간 창원문화재연구소가 발굴조사를 진행했으며, 그 결과 봉림사라는 명문이 남은 와편이 수습됐고, 삼층석탑지, 금당지 등의 주요 건물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구산선문의 복원과 불교 성보에 대한 종단이나 문화재 관련 기관의 관심 부족으로 복원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사찰을 떠난 문화재 역시 언제나 돌아올 수 있을지 요원하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530호/ 6월6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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