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358호 영전사지 보제존자사리탑은 고려말 왕사를 지낸 나옹 혜근(1320~1376)스님의 사리탑으로 2기로 이뤄져 있다. 20세 때 출가한 나옹선사는 충목왕 4년(1348)에 원나라로 건너가 연경의 고려 사찰인 법원사 등 중국 각지에서 수행한 후 공민왕 7년(1358)에 귀국했다. 공민왕 20년(1371)에 왕사에 오른 스님은 회암사에 주석하며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했다. 오늘날 전해오는 스님의 사리탑은 두 곳에 세워졌는데, 신륵사와 또 한 곳이 강원도 원주에 있는 영전사(令傳寺)터다. 스님이 입적하자 후학들은 스님의 사리를 따로 모셔 영전사에도 탑을 조성했다고 한다.
조선물산공진회 조경 위해 ‘서울로’
원주시 반환운동 불구 해결 미지수
우왕 14년(1388)에 조성된 영전사 보제존자 사리탑은 부처님 사리를 모신 탑모양을 하고 있다. 이는 보통 스님의 사리탑이 종모양 혹은 팔각원당형인 것과 사뭇 다르며, 스님의 또 다른 사리탑인 신륵사 부도 역시 석종형인 것과 비교해 봐도 특이하다. 거의 같은 양식의 탑 2기를 조성한 것도 또 다른 특징이다. 그러나 지난 2003년 한 연구가에 의해 쌍탑이 아니라 한 기는 보제존자사리탑, 다른 한 기는 비구니 묘관스님의 사리탑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두 사리탑의 외형을 보면,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으며, 높이가 무려 4m에 달한다. 2층의 기단 모서리에는 기둥이 새겨져 있고, 위층 기단에는 탑신을 받치기 위한 돌을 따로 집어넣었다. 몸돌에도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겼으며, 몸돌과 지붕돌 사이에는 4단의 받침을 넣어 구분해 놓았다.
<사진> 보제존자 사리탑 2기 가운데 서탑. 사진출처=문화재청
특이한 형태의 사리탑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12년 일본인 세키노 타다시에 의해서다. 그의 고적조사 이후 1915년 일본인에 의해 경복궁으로 옮겨졌는데, 조선물산공진회의 야외전시유물로 선정됐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전사터를 떠난 탑은 전시가 끝난 후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다른 여러 탑과 마찬가지로 서울에 남겨졌다.
이전 당시 사리탑 한 쪽에서 각종 사리장엄구와 탑지(塔誌)가 출토됐는데, 청자발과 은제도금육각사리기, 은제원통형사리기, 청동사리호 등이 수습됐다. 이와 함께 납석제지석(蠟石製誌石)이 발견됐는데, 탑지 명문에 따르면, 보제존자 입적 후 사리 1과를 모셔다 봉안하고 탑을 세웠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사리장엄구는 국립춘천박물관에 소장돼 있으며, 오는 29일부터 예정된 불교중앙박물관 승보전에서 전시될 예정이다.
보제존자사리탑의 귀환은 불교계보다 원 소장처인 원주에서 강하게 제기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들은 지난 2003년을 전후로 지역을 떠난 문화재에 대해 반환운동을 벌여왔으며, 이 가운데 보제존자사리탑도 포함돼 있다. 조선물산공진회 정원을 꾸민다는 단순한 이유로 반출된 만큼 돌아올 이유도 충분하다. 탑을 원래자리로 돌려놓겠다는 것 외에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할까. 그럼에도 원주시의 환수목소리는 메아리로 돌아올 뿐 이렇다 할 해결책이 보이지 않고 있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518호/ 4월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