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불·탑·사리장엄구 ‘뿔뿔이’19. 갈항사삼층석탑(葛項寺三層石塔) |
경북 김천 남면 오봉동에 위치한 갈항사는 신라 효소왕(孝昭王, 재위 692∼702) 때 당나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승전(勝詮)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상주 지역에 사찰을 짓고 돌과 나무를 청중삼아 <화엄경> 강연을 연습해 명강설자로 유명해진 승전스님은 이곳에서도 사부대중을 대상으로 <화엄경>을 설했다고 한다. 그러나 건립이나 폐사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 없어, 사찰이 언제 사라졌는지 알 수 없다. 일제 때 도굴사건 터진 후 서울 이전 2기 탑 있던 곳엔 표지석만 덩그러니
기단에는 “이 두 탑은 천보 17년, 무술년에 세웠으며(二塔天寶十七年戊戌中立在之) 오빠와 두 자매 셋의 힘으로 이루었는데(妹三人業以成在之), 오빠는 영묘사의 언적법사이시며(者零妙寺言寂法師在) 손윗누이는 소문황태후이시며(者照文皇太后君女在) 손아래누이는 경신대왕의 이모이시다(妹者敬信太王女在也)”라고 기록돼 있다. 여기서 말하는 천보는 중국의 연호로, 계산해보면 갈항사 탑 2기가 통일신라 경덕왕 때 세워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명문은 이두로 적혔는데, 탑 조성 당시 신라에서 사용한 언어현황을 반영해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사진>김천 길항사 삼층석탑 2기 중 동탑.사진출처=문화재청 탑은 통일신라석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2층 기단 위에 3층 몸돌이 올라간 모양이며, 규모나 구조가 같다. 동탑은 4.3m, 서탑은 4m 크기다. 기단의 네 모서리와 각 면 가운데에는 기둥모양이 새겨졌으며, 가운데는 두 개를 조각했다. 탑의 몸돌에도 모서리마다 기둥이 있고, 지붕돌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쌓았다. 동탑은 상륜부가 사라진 상태이며, 서탑은 3층 옥개석부터 잃어버려 온전하지 못하다. 이전할 때 기단 사리공에서 도자기 파편과 경전으로 추정되는 종이 등이 발견됐으며, 청동사리호와 금동사리병이 각각 수습됐다. 이 사리장엄구는 현재 대구국립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석탑이 사찰터를 벗어난 것은 일제강점기 때의 일이다. 1914년 총독부 조사결과, 탑 기단에 이두문으로 명문이 조각돼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됐다. 그리고 1916년 도굴꾼들이 탑 안에 봉안된 사리장엄구를 훔쳐 달아난 사건이 벌어졌다. 총독부는 탑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같은 해 8월 경복궁 앞뜰로 이전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전할 때 함께 자리를 옮겼다. 현재 박물관 석조공원에 세워져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갈항서 유물들은 이산가족 신세가 됐다. 현재 갈항사 터에는 보물 245호 오봉리 석조석가여래좌상과 철책 안에 봉안된 검게 그을린 석불 1위가 남아 있다. 또 2기의 탑이 있던 자리에는 표지석이 세워졌다. 대신 2기의 탑은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으며, 탑 안에 봉안됐던 사리장엄구는 대구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534호/ 6월20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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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99호 갈항사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때 조성됐다. 쌍탑(雙塔)양식으로 금당에서 남서방향으로 세워졌으나, 이전된 후 경복궁 동서방향으로 위치가 바뀌었다. 이 가운데 동탑 기단에 명문이 남아 있는데, 경덕왕 17년(758)에 경주 영묘사 언적법사 3남매가 건립했다는 내용이다. 신라의 석탑으로 명문이 적혀져 있는 유일한 예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