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탁기관 반환 거부…‘안될 말’21. 석가탑 사리장엄구 |
국보 126호 석가탑 사리장엄구가 세상에 알려진 때는 1966년 10월이다. 이보다 한 달 여 앞서 스님들이 불국사에 침입한 도굴꾼들에 의해 탑 상단부가 기울어진 것을 발견해 신고한 것이 발단이 됐다. 훼손된 탑을 바로 세우기 위해 해체수리가 시작됐고, 이 과정에서 세계가 놀랄만한 최고(最古) 목판인쇄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60년대 국립박물관에 관리만 맡겨 소유자 요구할 땐 돌려주는게 이치 문화재전문털이범들의 도굴 실패에 따른 결과로 시작된 해체수리 과정에서 3층 탑신 사리공 안에서 너비 17.2cm, 높이 18cm의 전각형 금동사리외함이 나왔다. 외함 안에는 알 모양으로 생긴 은제 사리 내.외합과 네모반듯한 금동사리합,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각종 구슬 등이 출토됐다. 또 사리함 주위에는 청동제비천상과 동경, 목탑, 경옥제곡옥, 구슬, 향목 등이 있었다. 사리함 바깥 기단부 바닥에서는 비단에 쌓인 종이 뭉치가 발견됐는데, 훗날 이 종이뭉치들은 석가탑 중수기 및 형지기 등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 때 수습된 성보들은 모두 1967년 9월자로 국보로 지정됐다. <사진>국보 126호 석가탑 내 출토유물. 그러나 1960년대만 해도 성보문화재를 보존·관리할 만한 체계를 갖춘 사찰을 찾는다는 일은 불가능했다. 결국 주지스님은 경주국립박물관(당시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장)에 석가탑 사리장엄구에 대한 위탁관리를 맡겼고, 이듬해 1967년 1월11일 국립박물관에 인수인계를 했다. 경주박물관에 보관되던 사리장엄구들은 1969년 다시 국립중앙박물관에 이관됐다. 2007년 불국사 소유의 성보문화재 반환을 놓고 조계종과 국립중앙박물관이 서로 대립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당시 조계종은 종단 산하에 불교중앙박물관 개관을 준비하면서, 불국사로부터 석가탑 내 출토유물 이관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아 문화재청과 함께 논의에 착수했다. 2006년, 반환에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관리자인 국립중앙박물관에 반환시기와 방법 등을 타진했다. 보험평가액 산정이나 경주박물관 소장 유물이전 등에 대한 구체적인 협의를 진행해나갔다. 그러나 2007년 3월 국립중앙박물관은 돌려줄 수 없다고 통보했다. “묵서지편 보존처리가 끝나지 않았고,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인쇄물은 최고 시설과 전문인력을 갖춘 국립박물관에서 보관해야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같은 박물관의 태도에 조계종은 강하게 반발했다. 단순한 위탁관리자인 국립중앙박물관은 반환여부를 결정할 권한이 없음에도 갑작스럽게 반환불가 통보를 한 것에 대해 납득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또 문화재 출토 이후 40년이 흘렀는데도 보존처리가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나, 보존처리에 대한 과정을 소유자에게 통보하지 않은 것 등을 지적했다. 구체적인 자료 없이 새롭게 개관한 불교중앙박물관의 보존·관리능력에 대해 폄하한 것도 문제였다. 공방 끝에 “국립중앙박물관 주도 하에 석가탑 유물에 대한 보존처리를 마친 후 관리주체를 결정한다”는 문화재청의 결정이 내려지면서, 반환논란은 일단락 됐다. 그리고 보존처리와 보고서 마감 시한인 6월말이 지나면서, 관리주체 결정에 대한 종단 안팎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소유자의 보존관리 능력이 향상돼 문화재 이관을 요구한다면, 소유자로부터 보존관리를 위탁받은 기관은 해당 문화재를 돌려주는 것이 이치다. 유독 문화재 분야에서만 이런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538호/ 7월4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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