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한 이 실수로 ‘떠돌이’ 전락20.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 |
경기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혜목산 기슭의 고달사터는 통일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됐다. 고달원(高達院) 또는 고달사원이라고도 불렸던 이곳은 문경 희양원(현 봉암사), 도봉원(현 망월사)와 함께 국가에서 관장하는 삼원(三院)으로 정해져 고려 초 왕실의 비호를 받았다. 광종은 삼원을 그대로 유지하라고 명했으며, 광종 이후에도 왕실의 후원은 끊이지 않아 고달사는 대찰의 면모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때인지 폐사됐고, 현재 사적 382호로 지정돼 있다. 총독부 ‘무너진 성보’ 주민에게 맡겨 훗날 후손이 처분했다 정부가 ‘회수’ 대찰이었던 만큼 고달사에는 여러 고승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먼저 원감국사 현욱스님(?~869)이다. 혜목산 고달사에 주석하며 후학들을 가르쳐 혜목화상이라고 불렀던 스님은 신라 44대왕인 민애왕부터 신무왕, 문성왕, 헌안왕에 걸쳐 스승의 예우를 받았고, 경문왕 때 입적해 원감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봉림산문을 개산한 진경대사 심희스님(853~923)은 고달사에서 현욱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기도 했다. <사진>보물 282호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 고달사의 역사에서 원종대사 찬유스님(869~958)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진경대사의 법을 이은 원종대사는 이곳에서 28년간 주석하며 후학들을 제접했다. 사찰터에 남아 있는 보물 제6호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보물 7호 원종대사혜진탑 등의 유적. “광종이 스님의 입적을 애도하며 사자를 보내 곡서(鵠書)로 조문하고 국공(國工)에게 사리탑을 만들라고 했으며, 문인들은 소리쳐 울며 시신을 받들었다”는 비문은 당시 스님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또 대사의 본명이 ‘고달’이라 사찰 이름을 고달사로 지었다는 설 등은 스님과 사찰의 깊은 인연을 시사한다. 조선시대 들어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달사터에는 지금 원종대사혜진탑 및 탑비의 귀부와 이수를 비롯해 국보4호 부도, 보물 8호 석불대좌가 남아 있다. 탑비의 몸돌은 1910년대 초반 파괴돼 여주군청에 옮겨져 보관되다가 경복궁으로 이관됐다. 함께 있던 쌍사자 석등도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보물 282호인 석등은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웅크리고 앉은 쌍사자 조각이 독특하다. 석등이 박물관까지 가게 된 사연은 이렇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는 고달사터에서 무너져 있던 석등을 발견했다. 문화재 지정에 앞서 총독부는 마을주민 이 모씨에게 석등의 부재를 보관하도록 했으나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잊혀졌다. 그러다 이 모씨가 사망하자, 1957년 그의 아들은 종로4가에 있는 동원예식장 주인 정 모씨에게 3만8000원을 받고 팔았다. 그러나 이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던 정부는 1958년 석등을 보물로 지정했다. 석등이 팔렸다는 것을 뒤늦게 안 정부는 사태수습에 나섰고, 1959년에야 겨우 석등을 회수할 수 있었다. 보관하던 이의 무지로 팔려나간 석등은 그러나 고달사지가 아닌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고, 용산박물관으로 이전된 이후에는 현재 야외전시관에 전시돼 있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536호/ 6월27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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