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몸이던 유물, 도굴로 흩어져22.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에서는 보물 751호 민애대왕석탑사리호와 소형탑, 사방에 부처님이 새겨진 금동사리함 등이 출토됐다. 1960년대 도굴당해 존재를 알 수 없었으나, 1966년 가을 도굴범들이 잡히고 사리장엄구가 회수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소탑 대다수는 사라졌고, 일부 사리장엄은 심하게 파손됐다. 회수 후 사리호·사리함 30년 생이별 동화사 특별전서 잠깐의 해후 이뤄져 특히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민애대왕석탑사리호는 4개의 조각으로 깨져 복원했지만 조각 일부가 사라졌고, 뚜껑도 없다. 사리호는 높이 8.3㎝, 아가리 지름 8.0㎝, 밑지름 8.5㎝의 항아리 모양이다. 법광사 삼층석탑이나 축서사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사리호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데, 9세기 중엽 신라에서 유행하던 양식으로 추정된다. 어깨 부분에 꽃 구름무늬와 빗금 꽃무늬를 새겨져 있다. 표면 전체에 흑칠(黑漆)을 한 점이 도드라지는데 여기에 선각으로 구획을 만들고 음각으로 글씨를 썼다. 7자씩 38행의 명문에는 탑 조성배경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사진>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금동사리함의 모습. 사진출처=<영원한 생명의 울림, 통일신라 조각> 탑은 경문왕 3년(863)에 민애왕(재위 838∼839)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됐다. 명문에 따르면, 불사는 동화사에 주석하던 헌덕왕자 심지(진표율사의 제자)의 주관아래 이뤄졌다. 장례를 치룬 뒤 2주기(24년)가 지나 동화사 원당 앞에 탑을 세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비로암이 왕실의 원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소탑은 3기가 남아 있는데,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법식에 따라 77기 또는 99기가 봉안됐으나 도난 과정에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함께 발견된 사방불(四方佛) 금동사리함은 현재 4장의 판으로 분리된 상태다. 측면에 각각 4개의 구멍이 뚫려있는데, 연결시켜보면 네모난 사리함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도난당한 뒤 수습돼, 결합방식이나 각 불상의 위치를 알 수 없다. 4면은 각각 삼존불로 구성돼 있으며, 각 면의 주존은 보관을 쓰고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불, 약합을 든 약사불, 항마촉지인을 한 부처님과 합장을 한 부처님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 사리함 가운데 외면에 사방삼존불이 새겨진 것은 비로암 사리함이 유일하다. 도굴됐던 사리장엄이 확인된 이후, 1967년 삼층석탑은 해체.수리됐다. 이 때 1층 탑신 중아에서 방형 사리공이, 바닥에 사리호를 안치했던 연꽃문양이 새겨진 동판과 목제소탑이 발견됐다. 금동판을 고정시켰던 흔적도 남아 있어 사리함 내부에 사리호가, 네 모서리에 목제소탑이 배치됐음을 확인했다. 비로암 삼층석탑에 안치됐던 사리장엄구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나, 사리장엄구는 동화사로 돌아가지 못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민애대왕석탑사리호는 동국대 박물관에 맡겨졌고, 금동사리함은 국립대구박물관으로 이관됐다. 30년 간 떨어져있던 비로암 사리장엄들은 지난 4월28일부터 8월16일까지 대구박물관에서 열리는 ‘동화사 특별전’에서 비로소 해후했다. 그러나 100여일 간의 만남 뒤에는 각각의 자리로 돌아가야만 한다. 비로암 삼층석탑 사리장엄구가 원 자리로 돌아가는 길은 요원하기만 하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540호/ 7월11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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