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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위치조차 모르는 비운의 탑

24. 전(傳)흥법사염거화상탑

전(傳)흥법사 염거화상탑은 국보 104호로, 통일신라 때 조성됐다. 조계종조 도의조사의 제자인 염거스님(?∼844)의 사리탑이다. 탑을 옮겨 세울 때 발견된 금동탑지(金銅塔誌)에는, 통일신라 문성왕 6년(844)에 세운 염거스님의 탑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문화재 탐낸 일본인에 의해 서울로

‘설악산 억성사’ 주장 있지만 불확실

염거스님은 설악산 억성사에 주석하며 후학들을 제접했으며, 도의조사가 전한 남종선이 신라에 전해지는데 매개 역할을 담당했던 출가자다. 가지산문을 개창한 체징스님이 스님의 제자이며, 홍각 이관스님은 염거스님에 이어 억성사에 머물며 전법활동을 벌였다.

이 탑은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을 한 사리탑 중에서 가장 오래된 양식이다. 이후 조성된 사리탑 대부분은 이 양식을 따라 조성됐으며, 스님의 탑은 신라승탑의 모태가 됐다.

탑의 구조를 보면 기단 위에 몸돌을 올린 뒤 다시 지붕돌을 얹고, 상륜부가 있는 형태다. 기단은 상.중.하 3층으로 이뤄졌다. 맨 아랫돌에는 사자를, 가운데 돌에는 안상과 연꽃, 향로, 꽃문양 등이 새겨졌으며, 연꽃 밑에는 연좌와 보개, 보주, 꽃문양 등을 조각했다. 윗돌은 2층인데, 팔각형으로 된 각형 받침을 만든 아랫돌 옆면에는 연꽃을 이중으로 새겼다. 윗면에는 안상과 여러 문양이 남아 있다.

<사진>일제시대 서울로 옮겨진 염거화상탑은 현재 용산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탑신은 목조건축 양식을 따랐다. 지붕돌은 기왓골이나 기와 끝마다 새겨진 막새기와의 모양, 서까래 등을 그대로 재현했다. 몸돌의 각 면에는 좌우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새겼고, 앞뒷면에는 문짝 모양을 새기고 자물쇠와 문고리를 조각했다. 문 양쪽에는 사천왕상이 서 있는데, 승탑을 외호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오늘날에는 상륜부가 남아 있지 않지만, 1920년대에 촬영한 사진에는 옥개석 위에 복발 1석과 보륜 2석이 확인된다.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훼손됐음을 짐작할 수 없다.

사실 염거화상탑은 원래 위치조차 알 수 없는 비운의 탑이다. 어느 때인지 명확치 않지만 1911년 이미 일본인에 의해 서울로 반입됐고, 탑골공원에 20년 간 방치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후 경복궁으로 다시 이관됐다. 사실 염거스님의 탑은 흥법사에 세워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원 위치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흥법사에서 출토됐다는 것은 일제 때 탑을 소장하고 있던 곤도 사고로라는 일본인의 증언에 따른 것이다.

그러다가 정영호 단국대 석좌교수가 원위치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원 장소에 대한 논란이 일게 된다. 염거화상이 설악산 억성사에 주석했다는 것은 여타 스님의 비문을 통해 전해져 오고 있지만, 흥법사에 대한 기록은 없고, 설악산과 원주 흥법사의 거리는 너무 멀어 유사성이 떨어진다. 게다가 1929년 흥법사지를 조사했던 오가와 게이기치는 논문에서 염거화상탑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고 기록해 정 교수의 주장은 설득력을 얻었다. 결국 전(傳)이라는 칭호가 붙으면서 탑의 원래 자리를 찾는 연구는 미궁으로 남았다.

일각에서는 최근 억성사로 추정되는 원주 선림원지가 원래 자리라는 주장이 제기되지만, 확실치 않다. 현재 탑은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무턱대고 다른 나라의 문화재를 탐낸 일본인들의 욕심에 결국 염거화상탑은 돌아갈 곳을 잃었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544호/ 7월25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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