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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아도 개인적 비통함이 있는가


문: 참선의 중흥에 대해 토론하는 내용 중에, ‘경허선사(鏡虛禪師)께서도 도를 깨닫고 난 뒤에 의발(衣鉢)을 전할 사람이 없어 안타까워했었다’는 설명을 봤습니다. 그 내용이 옳다면 깨달은 분들도 무언가에 걸릴 수 있구나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정말로 경허선사와 같은 선지식도 자신의 의발을 전하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것인지요?

깨침은 감정 넘어 툭 터진 세계

사사로운 비통함 가지지는 않아

답: 경허선사의 오도가(悟道歌)에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처음과 끝부분에 중복적으로 표현된 ‘사고무인 의발수전 의발수전 사고무인(四顧無人 衣鉢誰傳 衣鉢誰傳 四顧無人)’이라는 표현입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이 없구나. 의발을 누구에게 전할꼬? 의발을 누구에게 전할꼬?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이 없구나”하는 내용입니다.

언어문자는 참 편리하기는 하지만 또한 갖가지 오해를 가장 많이 일으키는 것이며, 사전적인 해석의 틀에 갇히면 진실과 멀어지게 되기에 딱 알맞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법이 전해졌다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전등(傳燈)을 설명할 때, 언어 밖의 도리를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삼처전심(三處傳心)을 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가섭존자와만 통했다는 세 곳의 행위는 진실이고, 다른 모든 제자들과의 대화(經)는 거짓이었을까요? 꽃을 드신 부처님의 행위는 모든 제자들에게 평등하게 설하신 법문입니다.

‘말하지 않는 말씀’이었는데, 다른 제자들은 아무도 알지 못하고 오직 가섭존자만 알고 미소로 답을 함으로써 ‘듣지 않는 들음’을 증명했습니다. 즉 부처님은 모두에게 평등하셨지만 제자들에게는 차등이 있어서, 오직 가섭만 부처님과 대화를 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영산회상에서 꽃을 든 것이 비밀이 아니라 다만 가섭만 그 법문을 들었을 뿐이듯이, 경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은 누구에게도 비밀이 없이 언제나 평등하게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지만, 그러나 그 말씀(經)을 듣는 후학들에게는 차등이 있어 정말로 부처님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이가 드문 것일 뿐입니다. 만약 부처님께 전해줄 마음이라는 것이 있었다면 이미 모든 경전에 다 드러나 있을 것입니다. 경허선사는 제자들을 가르치던 뛰어난 강사였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신이 가르치던 그 모든 이론이 그림자 같은 것임을 알게 됩니다. 피나는 노력 끝에 이윽고 깨닫게 되시고, 그때의 기쁨을 ‘오도가(悟道歌)’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의 첫 마디가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이 없구나. 의발을 누구에게 전할꼬?”였습니다.

이 말은 결코 당신의 깨달음을 이을 제자가 없다는 뜻으로서의 ‘가사와 발우를 전할 사람이 없다’는 비통함이 아닙니다. ‘온 천지에 사람이랄 것도 없고, 법이랄 것도 없으며, 마음이랄 것도 없고, 부처랄 것도 없는데, 누가 의발을 전하고 누가 의발을 받을까 보냐!’하는 거침없는 일성(一聲)을 던진 것입니다. 경허선사는 직접 의발을 전해 받았기 때문에 깨달은 분이라고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경허선사에게는 당시 생존하신 ‘법 스승(法師)’이 없었습니다.

경허선사를 바로 만나지 못한 이가 착각하여 ‘깨달음의 노래’를 자기의 분별로‘제자 없어 비통해한 노래’인 것처럼 해석해 버리듯, 경을 통해 부처님을 만나지 못하면 부처님을 진흙탕에 빠뜨리고, 어록을 통해 조사를 만나지 못하면 조사를 욕보이게 됩니다. 깨달은 이들은 결코 부질없는 것에 걸리지 아니하고, 선지식은 사사로운 비통함이 없습니다. 그렇게 보인다면 그것은 보는 사람의 어리석은 분별일 뿐입니다.

송강스님 /개화사 주지

[불교신문 2422호/ 4월30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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