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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전등사의 사랑이야기

고려 충렬왕의 부인인 정화궁주가 옥등을 밝혔던 인천 전등사 대웅전. 오른쪽 아래 사진은 어긋난 도편수의 사랑이야기 전설이 전하는 조각상.
전등사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 위치한 전통사찰이다. 단군 왕검의 세 왕자가 쌓았다는 정족산 삼랑성(사적 130호)내에 위치하며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해 진종사(眞宗寺)라 불렀다.
이 절에는 정화궁주의 애틋한 사랑이야기와 도편수의 사랑이야기, 열매를 맺지 않는 은행나무, 국가위기 때마다 우는 울나무 등 많은 이야기가 전한다.
국권 잃은 ‘고려여인’ 옥등 밝히며 설움 달래
대웅전에는 도편수의 어긋난 사랑 이야기 전해
관료횡포에 은행나무 열매 안맺은 기적도 보여
이 중 사랑이야기가 많이 알려져 있다. 고려 제25대 왕인 충렬왕은 태자로 있을 때 정비로 정화궁주를 맞이한다. 그렇지만 원나라(몽골)의 침입을 받아 고려는 부마국(임금은 원나라의 공주와 결혼을 의무적으로 해야 했다)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전까지 황제국가로 군림하며 ‘종’이나 ‘조’의 호를 사용했으나 이때부터는 ‘왕’이라는 호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충렬왕도 원나라에 볼모로 가서 충성을 맹세하고 제국공주(원나라 세조의 딸로 후에 장목왕후가 된다)와 결혼을 한다.
“나라가 속국인 된 것만 해도 억울하고 분한데 왕비의 자리까지 빼앗겨야 한단 말인가.”
억울함과 분함을 참지 못한 정화궁주는 시름의 세월을 보낸다. 그 사이에 원나라 출신의 제국공주는 충렬왕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나아가 정화궁주를 모함하기까지 한다.
“전하. 정화궁주가 전하에게 저주를 내리기 위한 기이한 행동을 한다는 소문이 궁 안에 파다합니다. 어서 그 원인을 살펴보소서.”
급기야 충렬왕은 이성을 잃고 정화궁주를 감금하는 행동까지 했다. 임금의 정비로 책봉됐다가 왕후가 되지 못하고 귀비(貴妃), 숙비(淑妃), 현비(賢妃) 등의 아래 작호인 궁주(宮主)에 머물고 만 정화궁주는 “내 나머지 삶을 부처님 전에 기도하며 고려의 부강을 기원해야겠다”고 발원했다. 정화궁주는 시간만 나면 전등사를 찾았다. “자비하신 부처님. 우리 고려가 하루 빨리 원나라의 속국신세를 면하게 할 수 있게 해 주소서.” 정화궁주는 간절한 염원을 실행하기 위해 ‘인기’라는 스님에게 부탁했다.
“스님께서 바다 건너 송나라에 가서 대장경을 인쇄해 돌아와 주세요. 그래서 이 진종사에 봉안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예, 마마의 뜻이 그러하다니 소승이 다녀오겠습니다.”
먼 바닷길을 항해해 인기스님은 대장경을 모셔왔다. 나라 잃은 설움과 왕의 사랑을 받지 못한 정화궁주는 오로지 부처님께 의지해 나라의 안위를 생각하며 장인에게 부탁해 옥등(玉燈)을 만들어 함께 부처님 전에 시주해 매일 등불을 밝혔다고 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진종사는 ‘전등사(傳燈寺)’로 불리게 됐다.
<사진> 열매가 맺지 않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은행나무.
전등사에는 조선중기 때 대웅보전 중수를 할 때 도편수와 마을 주모와의 이루지 못한 애틋한 사랑이야기도 많이 알려져 있다. 전설에 따르면 당시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편수가 대웅보전 건축을 지휘하고 있었다.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그는 공사 도중 사하촌의 한 주막을 드나들며 그곳 주모와 눈이 맞았다. 사랑에 눈이 먼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막집 여인에게 모조리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불사가 끝나면 오순도순 함께 살자”는 굳은 약조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인은 그 뜻을 저 버리고 도망을 가 버린다. 이에 분한 마음을 가진 도편수는 여인의 모습을 새겨 세세생생 벌을 받도록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로맨스가 있는 사랑이야기를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해 가공된 것으로 보여진다. 교리학적으로는 대웅보전을 받치고 있는 조각상은 원숭이 상으로 판단된다. 전등사는 입구에 사천왕문이나 금강문이 없어 불법을 지키는 신장이 없다. 전등사 주지 혜경스님은 “원적에 든 서운 조실스님께서도 대웅전 조각은 동서남북을 지키는 수호신이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스님은 이어 “몇 년 전 몽골 성지순례를 했을 때도 전등사 대웅전과 비슷한 모습을 본 적이 있다”고 말해 도편수가 불법을 지키는 신장으로 원숭이 상을 조각해 놓은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익살스러운 조각상은 일반 사람들에게 ‘도편수의 어긋한 사랑이야기’로 보여 지면서 널리 회자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야기대로라면 도편수는 사랑을 배신한 여인을 원망해 형벌을 주기 보다는 참회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라는 경책으로 나부상(裸婦像)을 새겨 넣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등사에는 입구 윤장대 아래에 두 그루의 큰 은행나무가 있다. 수령만 해도 600여 년으로 추정된다. 한 그루는 노승나무, 다른 한 나무는 동승나무로 불리기도 하고, 암컷, 수컷으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두 그루의 은행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는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 이유가 전설을 통해 내려오고 있다.

<사진> 전등사에 전해내려 오고 있는 옥등.

시기는 조선 철종 임금 때다. 나라에서는 전등사에 명을 내렸다. “귀 사찰은 은행 스무 가마를 나라에 바치시오.” 하지만 전등사는 은행 수확이 잘해야 열 가마밖에 되지 않았다. 분명 불교를 박해하는 관료들의 터무니없는 횡포가 분명했다. 사찰 소임스님이 전등사 조실스님께 이 사실을 알렸다.
“조실스님! 나라에서 터무니없는 요구를 해 왔습니다. 은행 스무 가마를 바치라고요.”
“이거 참 난감한 일이로구나.” 조실스님은 어려운 문제를 풀기 위해 당시 백련사에 주석하고 있던 추송스님에게 도움을 청했다. 며칠 뒤 추송스님이 전등사를 찾았다. 곧 마을에는 도력 높은 추송스님이 전등사 은행열매가 두 배 많이 열리도록 3일 기도를 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관리들도 소문을 듣고 전등사에서 기도하는 추송스님을 보며 자기들끼리 속삭였다. “제 아무리 도력이 높다 해도 못할 거야.”
기도가 회향되던 날 기이한 일이 발생했다. 추송 스님의 기도를 지켜보던 관리들의 눈 주변이 주먹에 얻어맞은 듯이 퉁퉁 붓고 퍼렇게 멍이 든 것이다. 추송스님은 대중들에게 소리쳤다. “이제 전등사 은행나무에서는 더 이상 열매가 열리지 않을 것이오.”
대중들이 의아해 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광풍이 불었다. 그리고는 억수같은 비가 하늘에서 쏟아졌다. “추송스님이 도력을 부렸다. 큰 화를 입기 전에 빨리 피하자.” 관료들이 허둥지둥 상처를 부여잡고 도망을 갔다. 바라보던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미쳐 도망치지 못한 대중들은 땅바닥에 엎드려 꼼짝도 하지 못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자 하늘에 먹구름이 걷히고 날씨가 맑아졌다. 남아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보니 추송스님과 조실스님, 소임스님은 그 자리에 보이지 않고 사찰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해 가을 은행 수확 철이 되어 나라에 바치기 위해 은행나무 아래로 스님들이 찾아갔다.
“아니. 은행이 한 알도 열리지 않았어.”
이 사실을 안 나라에서도 전등사에 대해 은행을 바치라는 명을 내릴 수 없게 되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사람들은 “전등사에 보살님이 스님으로 오셔서 터무니 없는 일을 시킨 관료들의 횡포를 막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 현재까지 전등사에는 은행 열매가 열리지 않고 있다.
강화=여태동 기자 tdyeo@ibulgyo.com
찾아가는 길 /
승용차를 이용할 때는 김포를 거쳐 강화도로 난 초지대교를 건너면 전등사 이정표가 나온다. 외버스는 서울 신촌에서 전등사 사이를 1시간 간격으로 운행한다. 인천에서는 인천터미널에서 광역버스 700번인 전등사 앞까지 운행한다. (032)937-0125
참고 및 도움: 전등사 발간 <전등사>, 전등사 주지 혜경스님 및 박석암 기획팀장 , 전등사 홈페이지.
[불교신문 2420호/ 4월23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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