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미국인의 집안소품 된 ‘국보’26. 헨더슨컬렉션 중 안평대군 금니사경 |
헨더슨 컬렉션의 주인공은 미국인 그레고리 헨더슨(1922~1988)이다. 그는 1948년부터 1950년까지, 1958년부터 1963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한국에 거주하면서 미군정청과 주한 미국대사관 문정관으로 활동했다. ‘한국통’으로 불렸던 그는 외교관 직에서 물러나 미국으로 돌아간 뒤, 한국문제 전문가로 변신했다. 1968년 하버드에서 <소용돌이의 한국정치>를 발간했는데, 지금까지도 국내외 대학에서 교재로 쓰인다. 외교관 지위 악용, 중요문화재 반출 구입과정 한국인이 도와줘 더 ‘씁쓸’ 헨더슨은 정치는 물론 문화재에도 ‘한국통’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거주하는 동안 많은 문화재를 수집했다. 1969년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한국의 도자기를 주제로 전시회를 개최하면서 발간한 도록에는 143점의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등이 수록돼있는데, 수준 높은 한국도자기 다수가 그의 소유임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조선의 명필로 꼽히는 안평대군의 <지장경> 금니사경과 고려말 조선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석가여래탱화 등 불화, 불상, 서예류가 포함돼 있다. 헨더슨 컬렉션이 부적절하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그가 외교관이란 지위를 이용해 콜렉터들이 평생을 들여 모을 분량의 뛰어난 문화재들을 단 시간에 수집한 뒤, 모조리 자신의 나라로 가지고 돌아갔다는 점이다. 그가 한국을 떠난 시기는 1963년. 그 때도 물론 지정문화재를 반출할 때는 문교부 장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하지만 비지정문화재는 허가 없이 해외로 가져나가는 것이 가능했다. 1961년 채택된 ‘외교관에 대한 빈 협약’ 덕분에 이삿짐 검열을 받지 않았다. 덕분에 고국으로 돌아가는 헨더슨의 짐은 무리 없이 우리나라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먹고 살기 급급해 문화재 보존할 여유가 없는 한국을 찾은 미국인 외교관이, 문화재 의식이 높지 않고, 문화재보호법이 제대로 틀을 갖추지 못했던 한국의 현실을 적절히 이용한 셈이다. 게다가 국보급 유물들 가운데에는 그가 직접 구입한 것도 있겠지만, 당시 한국 고위직들로부터 뇌물로 받은 것이란 설도 파다해 도덕성 문제까지 제기되고 있다. 헨더슨컬렉션 중 안평대군이 쓴 <지장경> 금니사경.사진출처=문화재제자리찾기 그렇게 싸들고 간 문화재들은 그의 집의 인테리어 소품으로 활용됐다. 석가여래탱화는 벽난로 위에 걸렸고, 안평대군의 글씨도 집 한구석을 장식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유족들은 유물들을 하버드대 부설 아더 앰 새클러 박물관에 기증.판매 형식으로 넘겼다. 도자기 145점이 1992년에 기증됐고, 헨더슨의 미망인 사망 후인 2008년에는 그녀가 소장하던 컬렉션이 하버드대 발전기금으로 전해졌다. 나머지는 지난 2008년 10월 열린 경매에서 팔렸다. 안평대군이 쓴 금니사경본은 다행히 아직 팔리지 않았다. 세로 40.5cm, 가로 21.6cm로 푸른색 감지에 금니로 <지장보살본원경> ‘촉루인천품’을 썼는데, 진품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북한 불교계는 아더 세클러 박물관에 이 유물을 반환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하지만 쉽지 않은 것이 사실. 헨더슨의 유물 구입과 반출 과정을 도와준 앞선 한국인의 부끄러운 기억은, 오늘을 사는 후손들에게 소중한 유물을 빼앗았다는 서글픔으로 전이됐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549호/ 8월15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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