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모습 잃고 원래 터마저 ‘수몰’25. 정토사 홍법국사 실상탑·비 |
정토사는 통일신라 말과 고려초 사이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찰이다. 충북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개천산에 있었다. 고려 태조로부터 국사 예우를 받았던 법경대사 현휘스님이 창건했고, 이어 홍법국사가 이곳에서 후학들을 제접했다. 일제 때 옮겨 다니며 상륜부 유실 1천년 지킨 자리도 댐으로 사라져 실상탑과 비는 홍법국사를 기리기 위해 후학들이 세운 것이다. 보물 359호인 홍법국사 실상탑비는 고려 현종 8년에 건립됐다. 당대 명필로 꼽히던 손몽주가 비문을 지었다. 비 앞면에는 스님의 행장이, 뒷면에는 제자들의 이름이 새겨 있다. 비의 모양르 보면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거북받침돌의 머리는 용으로 표현됐는데, 통일신라 후기와 고려 전기에 나타나는 양식적 특징이다. 머릿돌에도 용 조각이 있다. 비문에 따르면, 홍법국사는 통일신라 말부터 고려 초에 활약했던 스님이다. 신라 신덕왕 때 태어나 12세에 출가했다. 고려 태조 13년(930)에 조북산 마가갑단(摩訶岬壇)에서 구족계를 수지하고,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중국 곳곳에서 공부한 스님은 귀국해 선풍을 진작시켰으며, 성종은 스님에게 대선사의 호를 내렸고, 목종은 국사로 추대했다. 스님의 입적한 시기는 확실치 않은데 고려 현종 8년(1017)때로 추정된다. 결가부좌한 상태에서 입멸에 들었으며, 이 소식을 접한 목종은 국서(國書)와 함께 돈과 재물을 내렸으며, 시호(諡號)를 홍법, 탑 이름을 실상(實相)이라 했다. <사진>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 102호 정토사 홍법국사 실상탑.사진출처=문화재청 국보 102호 홍법국사 실상탑은 고려 현종 8년 이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의 가장 큰 특징은 둥근 모양의 탑신이다. 가로-세로로 묶은 것처럼 보이는 십(十)자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교차점에는 꽃무늬로 장식했다. 또 여덟 개의 모서리마다 꽃을 조각했다. 기단은 네모난 바닥돌 위에 8각의 받침이 3단으로 이뤄져 있는데, 맨 아랫돌 위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굄을 넣었고, 중간 돌에는 구름을 타고 있는 용무늬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다. 지붕돌은 삿갓 모양을 하고 있으며, 밑에는 비천상이 조각됐다. 8각형을 기본으로 하는 신라의 부도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공 모양의 몸돌을 새롭게 시도해 고려 초기를 대표하는 승탑이다. 충주 정토사터에 있어야 할 이 탑과 비는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관리하고 있다. 일제시대인 1912년 이후 정토사터에서 반출돼 충주군청에 있다가 1915년 이후 경복궁으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과정에서 실상탑 상륜부는 유실됐고, 탑비의 지대석만 원래 절터에 남겨져 탑과 탑비 모두 본 모습을 잃었다. 정토사를 지키던 또 하나의 탑은 보물 17호 법경대사 현휘스님의 자등탑비이다. 일제 때 실상탑과 비는 경복궁으로 옮겨졌지만, 자등탑비 만은 서울로 보내지지 않고, 원래 터를 지켰다. 하지만 1000년을 이어오던 정토사터는 결국 개발이기에 몰려 사라지고 만다. 충주댐 건설로 인해 정토사터가 수몰되면서, 1983년 현재의 위치인 하천리 절골마을로 이전했다. 옛 정토사의 초석들도 함께 옮겨와 이곳에 전시되고 있다. 절골이라는 이름이 옛날 사찰이 있던 마을임을 보여주지만, 사찰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대신 새로 만든 실상탑 재현품과 솟대가 세워져 이질감을 더할 뿐이다. 어현경 기자 [불교신문 2546호/ 8월1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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