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위해 옮겨진 뒤 귀향 못해32.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아미타불상 |
경주 내동면 신계리에 있던 감산사는 신라 성덕왕 18년(719)에 창건된 사찰이다. 감산사 창건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권3 탑상편에 수록된 ‘남월산’은 감산사에 대한 것으로, 신라 서울 동남쪽 20리쯤 되는 곳에 위치해 있던 사찰이다. 조성시기 명확한 통일신라 대표 자료 유명세 탓, 일제에 의해 결국 ‘서울로’ 금당의 주장 부처인 미륵존상의 불꽃 배경 뒷등에 쓰인 기록에 따르면, 개원(開元)7년 2월15일 6두품으로 집사부시랑을 역임한 중아찬 김지성이 돌아가신 부모와 가족들을 위해 감산 농장 전토를 희사해 절 한 채를 세었다. 창건 다음 해인 720년에는 어머니를 위해 미륵보살을, 아버지를 위해 아미타불을 각각 조성했다고 한다. 실제로 두 불보살상의 광배 뒷면에는 신라 성덕왕 19년에 불상을 조각하였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이를 통해 만들어진 시기와 유래를 알 수 있다. 광배에 새겨진 글은 설총이 지었던 것으로 보이고, 또 경융(京融)스님과 김취원(金驟源)이 글자를 새겼던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보살상과 아미타불상은 조성시기가 명확해 통일신라 불상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모두 국보로 지정돼 있다. <사진>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중인 국보 81호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상과 국보 82호 아미타여래상의 모습. 신체를 풍만하게 사실적으로 표현한 국보 81호 미륵보살상은 광배 높이 189.4cm, 너비 107.6cm로 대규모이다.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통통한 얼굴을 하고 있다. 목에는 두 줄의 목걸이가 화려하게 새겨져 있고, 곡선의 옷주름은 부드럽게 이어진다. 허리 부근에는 굵은 띠 장식과 함께 다리까지 길게 늘어진 구슬장식이 조각됐다. 광배 가장 바깥에는 불꽃무늬가 새겨졌고, 안쪽으로는 3줄로 머리와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했다. 불상이 서 있는 대좌는 3층으로 이뤄졌는데 맨 아래쪽은 8각 형태이며, 그 위에는 꽃잎이 아래, 위로 향하는 연화문이 새겨져 있다. 국보 82호 아미타여래상은 미륵보살상보다 약간 커, 광배 높이가 206cm, 너비 109.1cm에 달한다. 균형미가 뛰어나 인체비례에 가깝게 사실적으로 조형됐으며, 불상의 눈, 코, 입도 뚜렷하게 묘사돼 신라인의 이상적인 얼굴을 형상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양쪽 어깨를 덮은 법의는 U자형의 옷주름으로 구체화됐고, 목에는 한번 뒤집힌 옷깃이 표현돼 있다. 광배는 미륵보살상과 같은 형태인데, 몸광배 안에 꽃무늬를 새긴 것은 차이가 있다. 3층의 대좌의 구조도 같다. 석조 불보살상이 감산사터를 떠난 해는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가 열린 1915년이다. 사실 두 불보살상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금석문 수집에 열을 올리면서다. 광배 뒤에 새겨진 명문 때문에 일찌감치 일본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는데, 뛰어난 조각수법과 함께 문화재적 가치가 알려지면서 관련 연구결과가 여러 차례 발표되면서 유명세를 탔다. 결국 조선물산공진회의 중요한 전시물로 간택돼 1915년3월 서울로 옮겨지는 비운을 피하지 못했다. 역시 여러 문화재와 마찬가지로 박람회가 끝난 뒤에도 불보살상은 경복궁에 남겨졌다. 지금은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불교조각 전시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원래 불보살상이 조성됐던 감산사터에는 삼층석탑과 석등, 대석(臺石) 및 건물 기단지만 남아, 옛 절터를 쓸쓸히 지키고 있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564호/ 10월10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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