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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금석문 ‘수차례 수난’

33. 태자사 낭공대사비

태자사는 경북 안동시 도산면 태자리에 위치한 옛 절터다. 이곳에 있던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선사 낭공대사(832~915)의 행적이 기록된 비로, 고려 광종 5년(954)에 세워졌다. 문인 최인연 시랑이 왕명을 받아 글을 짓고, 단목스님이 신라 명필 김생의 행서 글씨를 집자한 것을 숭태.수규.청직.혜초스님이 새겼다. 세로 210cm, 가로 102cm이고, 글자크기는 2.1cm이며, 총 31행으로, 1행에 83자가 새겨진 큰 비다.
신라 명필 김생의 글씨 집자해 세워
일제 때 반출…결국 국립박물관으로
앞면에 기록된 스님의 행장에 따르면, 어릴 적부터 불심이 남다른 소년이었다. 아이들과 놀 때마저 불사(佛事)를 하니, 모래를 모아 탑을 만들고, 풀잎을 따서 향으로 삼았다고 한다. 출가할 결심을 아버지에게 전할 때는 자신의 소원이 출가수도해 부모님의 끝없는 은혜에 보답하려는 것이라고 밝혔으며, 부모님의 승낙을 얻어 가야산 해인사에서 출가했다. 문성왕 17년(855)에 복천사(福泉寺) 관단(官壇)에서 구족계를 받은 스님은 이후 사굴산문 범일국사의 제자가 되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스님은 당시 천자(天子)인 의종(860~873)에게 청해 보당사(寶堂寺) 공작왕원(孔雀王院)에 머물렀는데, 의종은 낭공대사와의 만남을, 법수대사가 진나라의 문제(文帝)를 만난 것과 담란법사가 양무제와 대좌한 것과 같다고 말했을 정도로 높이 평가했다. 중국 각지를 운수행각하던 스님은 헌강왕 11년(885)에 귀국했다. 그리고 진성여왕 3년(889) 스승인 범일국사의 병환이 깊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정성껏 시봉하다가, 입적 전 부촉을 받았다.
<사진>안동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 탁본.
스님은 신라가 인정한 고승이었다. 삭주(춘천의 옛 이름) 건자난야(建子蘭若)에 산문을 여니, 찾아드는 자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어 아침에 셋, 저녁엔 넷으로 이어져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효공왕은 국사(國師)의 예로써 대우했으며, 신덕왕도 스님을 왕궁에 초청해 경건하게 법을 청하니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을 정도였다. 말년에는 왕족의 후손이자 제자인 명요부인의 청을 받아, 스님은 경북 영일군 묘봉산 석남산사에서 주석하다가 신덕왕 4년(915)에 입적했다.
그러나 신라말은 후삼국시대로 혼란스러웠던 때라 스님을 기리는 활동은 미비했다. 고려 광종에야 이르러 비로소 비가 조성됐다. 광종은 탑명을 추증하고 경북 봉화 태자사에 이를 세웠다.
그러나 태자사는 폐사됐고, 비는 방치됐다. 조선 중종 4년(1509) 영천군수 이항이 비 측면에 쓴 추기(追記)를 보면, 김생의 필적을 찾아다니다가 낭공대사의 비를 발견하고 영천군 자민루로 옮겼다고 한다. 또 명종 대에는 중국 사람이 머물며 수천장의 탁본을 해갔다고 한다. 잘 보존됐던 탑은 어느 때인지 또 버려졌고, 흙속에 묻혔던 것을 겨우 꺼내 다시 영천관사로 옮겼다.
결국 비는 1918년 몸돌만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반출됐고,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세워졌다. 지금은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비는 몸돌 가운데가 부러진 것을 붙여놓은 상태이며, 훼손된 이유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재 안동 태자사터에 남은 귀부와 이수가 낭공대사비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필이라 추앙받는 김생의 글씨를 집자해 금석문 학자들의 감탄을 자아낸 낭공대사비이지만, 유랑생활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566호/ 10월17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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