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작’ 명성에 더 큰 수난30.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
전남 광양시 옥룡면 중흥산성은 고려 때 조성된 토성으로, 광양시 기념물 178호로 지정돼 있다. 백운산 중턱의 한재를 중심으로 구례.남원.하동.화개로 통하는 이곳은 교통요충지로, 임진왜란 때 의병과 승병의 훈련장이자 왜군과 격전을 벌였던 역사의 현장이다. 통일신라 대표 석등, 국보로도 지정 끊임없는 반출 위기 겪다 ‘박물관行’ 산성 서쪽 시냇가에는 3층 석탑이 남아 있었는데, 신라 경문왕 때 도선대사가 창건한 중흥사가 있던 자리다. 보물 112호로 지정된 탑은 통일신라 때 조성된 것으로,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양을 하고 있다. 기단부에는 인왕상과 사천왕상, 보살상이 조각돼 있다. 또 1층 몸돌에는 연꽃좌대 위에 앉아 있는 여래상이 새겨져 있는데, 조각상태가 양호하다. 탑은 2층으로 올라가면 급격히 작아지는데, 탑신에 비해 기단부가 커 보여, 비례감보다는 안정감을 준다. 삼층석탑 뒤 쪽에는 원래 쌍사자 석등이 서 있었다. 국보 103호로 지정된 쌍사자 석등은 통일신라 때 조성됐다. 석등은 일반적으로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는 3단의 받침돌을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뒤 꼭대기에 장식을 얹은 형태를 한다. 이 석등은 연꽃이 조각된 받침돌 위의 가운데 기둥을 쌍사자로 조각했다. 두 마리의 사자가 마주서서 가슴을 맞대고 있으며, 앞발로 16송이의 연꽃을 떠받들고 있다. 한 돌로 조각된 사자상은 골격이나 머리털이 사실적이고 자연스럽게 표현됐다. 또 연꽃받침 위에 8각의 화사석이 올려 있으며, 4개의 창을 뚫어 불을 밝힐 수 있게 했다.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석등으로 속리산 법주사 쌍사자석등과 함께 국보로 지정됐다. <사진>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국보 103호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석등은 뛰어난 조각수법으로 ‘걸작’이란 평가를 받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풍파를 겪어야 했다. 일제 때인 1918년 원위치를 떠난 뒤 오늘날 광주국립박물관에 전시되기까지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본격적인 고행의 시작은 1930년 무렵이다. <석조문화재 그 수난의 역사>에 따르면, 1930년 광양 옥룡면에 조직된 옥룡보통학교 후원회는 재원마련을 위해 중흥산성에 있는 석탑과 석등을 팔기로 합의했다. 당초 100원을 예상했던 주민들은 부산 골동상과 가격을 흥정하는 과정에서, 700원을 부르자 크게 놀라 군청과 상의를 한다. 그 과정에서 무단으로 문화재를 매매하는 행위가 법에 저촉된다고 해 매각을 일시 중단시켰다고 한다. 반면 석등이 있던 땅 소유자는 자신과 상의도 없이 문화재를 팔려고 한데 화가나 유물발견계를 내고, 이듬해 3월 총독부에서 조사를 진행하게 된다.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탑은 결국 팔렸다. 1100여점의 반출 한국문화재인 ‘오구라 컬렉션’으로 유명한 오구라 다케노스케의 손에 넘어갔다. 하지만 이전까지 가지는 못했다. 1931년에는 누군가가 석등을 몰래 운반해 산 아래 옥룡면 사무소 앞까지 갖고 나오다가 주민들의 반대로 달아났다는 기록도 있다. 이 사건 이후 관리보존의 어려움을 들어 탑을 광양읍내로 이전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결국 1932년 석등은 조선총독부로 옮겨져, 경복궁 자경전 앞으로 이전됐다. 그 뒤 1959년에는 경무대(현 청와대) 정원으로, 이듬해에는 덕수궁국립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겼고, 1972년에는 경복궁에 신축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건됐다. 지역에 국립박물관이 개관되면서 다시 이관돼, 광주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559호/ 9월19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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