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탐욕으로 얼룩진 ‘천년불상’
29. 경주 장항리 불상 |
경주 양북면 장항리 사지(寺地)는 사적 45호로 지정된 통일신라 때 절터다. 사찰 창건 연대나 이름이 전해지지 않아, 마을 이름을 따서 장항리 사지라고 불린다. 토함산 동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데, 절터가 있는 계곡은 감은사지 앞을 지나 동해로 흐르는 대종천 상류이다. 현재 이곳에는 서탑인 오층석탑과 동탑의 파괴된 탑재석, 그리고 금당터로 추정되는 곳에 석조불대좌가 남아 있다. 사리장엄구 훔치려고 탑 폭파시켜 대불도 산산히 부서져 ‘복원 불가’ 이 절터는 불행한 한국 근현대사와 맥을 같이 한다. 통일신라 때 조성된 뛰어난 불교문화재들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대부분 훼손된 서글픈 현장이 장항리 사지다. 현재 전하는 탑과 불상 파편은 당시 조각의 우수성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온전하지 못하다. 2기의 탑의 상태도 심각하다. 장항리 절터는 쌍탑가람 양식을 하고 있다. 계곡 사이의 좁은 공간을 이용해 오층탑 2기를 세우고 그 뒤쪽에 금당을 배치했다. 에밀레 종을 만들었던 성덕왕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전체적으로 균형감이 잘 맞고 조각수법도 뛰어나다. <사진>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서 있는 경주 장항리 석조불상.사진출처=신라문화원 <문무대왕동해릉> 1층 탑신의 각 면마다 문을 지키고 서 있는 한 쌍의 인왕상(仁王像)을 조각한 것이 특징으로, 8세기 걸작으로 꼽힌다. 그러나 탑은 1925년 일제 때 도굴범이 탑 속에 봉안된 사리장엄구를 훔치겠다고 폭파시켜 무참히 파괴됐다. 그나마 1932년 복원돼 기단 2층, 탑신 5층의 모습을 찾게 됐으며, 현재 국보 236호로 지정돼 보존.관리되고 있다. 또 부서진 동탑의 부재들은 계곡 속에 떨어졌고, 1966년에 이르러야 이양됐다. 하지만 초층 탑신과 옥개석만 쌓아놓아, 탑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다. 훼손된 것은 탑뿐만이 아니다. 금당지 중앙에 있던 불상 좌대와 불상도 모두 폭파됐다. 2단으로 돼 있는 대좌는 아랫단은 팔각형이고, 위는 연꽃이 조각된 원형으로 돼 있다. 그나마도 뒷부분의 3분의1은 폭파돼 흩어졌던 것을 복원해, 대좌 형태를 갖출 수 있었다. 이 대좌 위에 봉안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불상은 이 절터의 본존불로 알려져 있다. 탑과 마찬가지로 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불상 또한 폭탄의 위협을 피하지 못했다. 다른 유물과 마찬가지로 산산이 조각나 복원이 불가능한 상태다. 위에서 아래로 갈라져 두 동강이 난데다가 허리 아래쪽은 완전히 부서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또 광배도 흩어져 원형을 갖추지 못했고, 오른쪽 팔만 남아 있어, 아름다운 옛 모습을 잃어버렸다. 상반신만 남은 이 불상의 높이는 2.5m이며 불두 높이만 1.1m에 달한다. 허리 아래 부분은 사라졌지만, 불상 전체가 약 4.8m로 추정되는 대불이다. 거대한 크기도 크기이지만, 광배에 조각돼 있는 화불의 모습이나 불두의 조각수법이 우수해 8세기 통일신라 조각의 뛰어남을 보여준다. 지금 불상이 있는 곳은 국립경주박물관 야외 뜰이다. 수습된 조각을 토대로 복원했으나 원형을 찾진 못했다. 폭탄으로 훼손된 서탑이 다시 세워진 해인 1932년에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1000년을 이어온 불상은 인간의 탐욕으로 얼룩져 자비로운 모습을 잃고 말았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557호/ 9월12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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