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대상에서 유물로 전락35. 법광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
포항 법광사는 신라 진평왕(579∼631) 때 원효스님이 왕명을 받아 창건한 사찰이다. 당시에는 525칸에 이르는 대찰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대부분 훼손됐다. 옛 절터에는 다수의 석조유물이 남아 있는데, 이중 기단 위에 4층으로 된 사리탑과 조선 영조 때에 세운 사리탑 중수비, 연화석불대좌, 사적비와 쌍두귀부, 석조당간지주 등이다. 지난 2008년 1월 사적 493호로 지정됐다. 현재 남아 있는 당우는 1939년에 새로 중수한 것이다. 신라 왕실사찰 신봉 사리 도굴된 후 박물관에 전시 경주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법광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납석제ㆍ청동제 사리호(사진 왼쪽)와 2매의 탑지석.사진출처=<적멸의 궁전 사리장엄> 법광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는 도굴범에 의해 발견됐다. 1968년 8월 탑에 봉안된 사리장엄을 훔쳐 달아난 이들이 경찰에 붙잡히면서 사리호 2개와 탑지석(塔誌石) 2매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탑의 건립시기와 배경, 시주자 등을 기록한 탑지석이 사리장엄구로 발견되는 예가 드물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2매의 탑지석 가운데 신라 때 만들어진 1석에는 ‘회창 6년 병인 9월 옮겨 세우고 수리하다. 원컨대 대대로 단월은 정토에 태어나시고 금상께서는 복과 수명이 길이 뻗치소서. 안에 사리 22매를 넣다. 상좌 도흥(道興) 대화 2년 무신 7월 향조(香照)스님과 비구니 원적(圓寂)이 재물을 희사하여 탑을 세웠다. 절의 단월은 성덕대왕(成德大王)이며 전(典)은 향순(香純)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여기서 대화 2년은 흥덕왕 3년(828)으로, 이 때 향조.원적스님 시주로 탑이 세워졌으며, 회창 6년인 문성왕 8년(846)에 지금의 위치로 이전됐다는 내용이다. 사찰이 창건할 때 주요 시주자를 뜻하는 사단월(寺檀越)이 성덕대왕임을 밝힌 대목이다. 성덕대왕 김균정(?~836)은 원성왕의 손자이자, 신무왕.헌안왕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는 822년 발생한 김헌창의 난을 진압하고 상대등에 오르지만, 흥덕왕이 아들 없이 죽고 난 뒤 벌어진 왕위다툼에서 불행한 죽음으로 삶을 마감했지만, 신무왕이 즉위하자 성덕대왕으로 추존됐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통해, 법광사가 왕실 후원을 받은 사찰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다른 하나의 명문에는 영조 23년(1747)과 숙종 24년(1698)에 각각 중수됐음이 기록돼 있다. 이와 함께 탑 안에서 나온 2개의 사리호는 각각 청동제와 납석제로 만들어졌다. 이 가운데 납석제 사리호는 공 모양의 사리기는 인도 초기에 유행했던 모양을 따르고 있어 8세기 무렵 조성됐음을 보여준다. 안에는 8과의 사리가 봉안됐으며, 겉면에는 묵으로 쓴 ‘불정존승다라니(佛頂尊勝陀羅尼)’라는 구절이 있다. 높이 7.5cm의 청동제 사리호는 납석제 사리함을 넣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라 사리 외함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법광사 사리호는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것으로, 성덕대왕의 정치적인 숙적으로 왕권다툼을 벌였던 민애대왕 사리호와 축서사 사리장엄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8세기 당시의 사리장엄구의 조성양식과 함께 명문으로 당시의 시대상황을 전하고 있는 법광사 사리장엄구는 역사.문화재적 가치가 뛰어난 유물이다. 1000년 이상을 탑 안에 고이 보관돼 있던 유물은 그러나 도굴꾼의 소행으로 유출됐다. 경찰이 도굴범을 붙잡긴 했지만, 되찾은 유물은 사찰에 봉안되는 대신 국립박물관으로 이관됐다. 지금은 경주국립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는 유물이 되고 말았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574호/ 11월14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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