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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구와 탑은 ‘不二’이건만…

39.장흥 보림사 사리장엄구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장흥 보림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사진출처=<적멸의 궁전 사리장엄>





日 주도 발굴조사 과정서 옮겨진듯

지금이라도 원래 자리 봉안 되어야




장흥 보림사는 신라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로 통일신라 헌안왕 때 창건됐다. 가지산문을 중창한 보조선사 체징스님은 헌안왕 4년(860)에 왕의 권유를 받아 가지산 남쪽 기슭에 보림사를 세우고, 선법을 펼쳤다. 왕실의 후원을 받은 대찰이었던 보림사는 그러나 6.25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당우를 잃었다.

사찰을 대표하는 유물인 국보 44호 삼층석탑 및 석등은 창건 직후인 870년에 조성됐다. 이 무렵은 왕실이 주도해 원당과 원탑의 건립이 성행하던 시기로, 삼층석탑 또한 보림사 창건을 이끌었던 헌안왕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했다.

비로전 앞 두 기의 탑은 남북으로 서 있다. 구조나 크기가 같은데,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려놓은, 전형적인 통일신라 탑 모양이다. 두 기의 건립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통일신라 석탑의 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인 탑은 특히 상륜부의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와 보주가 그대로 남아 주목받고 있다. 상륜부가 온전하게 남아 있는 예가 좀처럼 없기 때문에, 탑 복원과정에서 참고자료로 활용되기도 한다.

석등 역시 통일신라의 양식을 그대로 갖고 있다. 사각형의 바닥돌 위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8각의 아래받침돌이 있다. 그 위에 기둥이 위에 윗받침돌을 얻은 뒤, 화사석을 올린 형태다. 이 석등 또한 완전한 형태로 보존돼 있다.

탑에서 나온 사리장엄구는 탑의 건립 배경에 대해 잘 설명해주고 있다. 사리장엄이 발견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33년이다. 당시 삼층석탑 보수과정에서 탑신부 초층 몸돌에서 납석제 사리호와 놋쇠 합 3개, 백자접시와 함께 남탑과 서탑에서 각각 탑지가 발견됐다. 납석제 사리호와 탑지는 통일신라 때 봉안한 유물이고, 나머지는 조선시대 때 탑을 중수하면서 넣었다.

납석제 사리호에서는 4과의 사리가 수습됐고, 사리호 주변에는 네모난 향나무 조각과 가사조각이 놓여있다. 탑지는 납석(蠟石)으로 만들어졌는데, 남탑지는 가로 9.5cm, 세로 9.6cm, 두께 2.6cm 사각형 판이며, 북탑지는 8.1~9.4cm의 육면체 모양이다. 탑지를 보면, 신라 경문왕이 즉위한 지 10년(870)이 되는 해에 선왕인 헌안왕을 위해 탑을 건립했고, 진성여왕 5년(891)에 사리 7매를 봉안했다고 나와 있다. 북탑지의 윗면과 아랫면에는 후대의 사실이 적혀 있다. 조선 성종 9년(1478)에 탑이 중수됐고, 인근의 쌍봉사와 무위사의 대회와 무위사에 주존불이 조성됐음을 알려준다. 또 남탑지의 뒷면과 옆면에는 성종 9년과 숙종 10년(1684)에 각각 탑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새겨 있다.

보림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는 지금 광주국립박물관에서 소장.관리하고 있다. 일본인 주도하에 발굴조사가 지정되다 보니, 사찰의 소유권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탑을 조성하기 시작한 이유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서라는 점을 따져보면, 탑 안에 응당 들어있어야 할 핵심이 빠진 셈이다. 사리가 신앙의 대상이고 이를 봉안하고 있는 장엄구나 탑은 불이(不二)라는 점을 문화재 관계자들의 인식할 때야 비로소 보림사 사리장엄구도 제자리를 찾아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584호/ 12월19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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