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두리’마을 설화가 전하는 인접지역인 귀례면 귀례리의 화강암 석재 채취 현장. 설화에 따르면 이곳에서 나온 석재로 원공국사 귀부와 이수를 조성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에는 ‘비두리’라는 마을이 있다. 속칭 ‘비두네미’라 부르는 이곳에는 옛날부터 질이 좋은 화강암이 많이 나와 그것이 비석재료로 많이 사용되었다. 마을 입구에는 거북모양의 귀부와 이수(강원도 유형문화재 70호)가 있는데 어느 시대에 세워졌는지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예로부터 거돈사지에 세워진 원공국사승묘탑비를 조성할 때 조성했던 첫 작품이라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스님의 道力으로 이수와 귀부를 옮기다
<비 갓> <비 받침대>
원공국사탑비 석물 조성 후 꿈쩍도 안하자
익명의 스님 ‘소의 혼’ 빌려 거돈사로 옮겨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거돈사터에 세워진 원공국사승묘탑비를 세울 때의 이야기다.
비와 좌대는 완성됐으나 비갓과 받침대(이수와 귀부)를 만들 만한 석재가 마련되지 않아 거돈사 주지 스님이 사방으로 찾아다니다가 인근 마을에 질 좋은 화강암이 나오는 것을 알았다. “이곳에서 좋은 석재를 구해 비갓과 받침대만 세우면 원공국사의 행적을 마무리할 수 있겠어.”
주지 스님은 장인을 데리고 와서 국사의 행적과 업적을 담고 있는 비문 덮개를 장식할 비갓과 받침대를 조성하도록 부탁했다. 예로부터 좋은 화강암이 많이 생산됐던 마을이라 돌을 조각하는 장인이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마을 뒷산으로 가서 큰 돌을 구해왔다.
“그래 큰 스님의 업적을 기록한 비문에 올릴 멋진 돌이야. 내가 어느 것보다 멋있고 웅장하게 조성해 큰스님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해야겠어.”
<사진>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에 위치한 원공국사승묘탑비.
장인은 혼신의 힘을 기울여 돌을 다듬고 또 다듬었다. 정과 끌로 용 문양과 구름 문양을 정교하게 양각한 비갓과 거북이 모양의 받침대도 조각했다. 하지만 원하는 대로 잘 만들어지지 않았다. 완성된 모양은 장인의 마음에 쏙 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장인은 거돈사 주지 스님을 찾아갔다.
“스님, 저는 지금까지 이 나라에서 누구보다 돌을 잘 다루는 장인이라고 자부하며 살아왔습니다. 이번 불사도 어느 때보다 심혈을 기울여 조성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어딘가 허전한 마음이 생깁니다. 원컨대 큰스님의 원력이 담긴 작품을 새로 조성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거돈사 주지 스님은 흔쾌히 승낙했다. “그래요? 장인께서 그렇게 노력하는 모습을 보아왔는데 제가 그 정도는 도와 드려야지요.” 그리하여 또 다시 마을 뒷산에서 큰 돌을 채취해 오게 되었다. 장인은 조각에 들어가기 전에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렸다.
“부처님, 이번에는 반드시 제가 원하는 큰스님 비갓과 받침대를 완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7일기도를 마친 장인의 정과 망치질 소리는 범상치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밤낮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대작이 나올 것을 짐작했다.
“저 사람은 잠도 자기 않고 저렇게 일을 하네. 저러다가 탈이라도 나면 어떻게 하려고….”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망치질 소리가 멈췄다. 거돈사 주지 스님과 마을 사람들은 비갓과 받침대가 완성됐음을 느끼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작품은 하얀 천에 가려져 있었고, 장인은 체력이 다해 탈진한 채로 옆에 누워 있었다. 장인을 추스르게 조치한 스님은 천을 살며시 걷어보았다. 하늘을 나는 듯한 구름을 타고 있는 용의 모습은 흡사 사바세계에 다시 오신 원공국사의 기품이 담겨 있었다.
“그래요. 지종스님(원공국사의 법명)의 법력을 제대로 표현한 것 같아요. 비갓과 받침대는 비문이 세세손손 이어져 이 땅에 불법이 흥성해야 할 이유를 설파할 것이 분명합니다.” 마을 사람들도 현장에서 기도를 올리며 불후의 명작 탄생을 축하했다. 두 개의 작품 가운데 나중에 만들어졌지만 일반인이 보기에는 어느 것이 뛰어난 작품인지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처음 만들어진 것도 잘 모시자고 의견을 모으고 마을 한 켠에 소중히 모셨다.
이제 남은 문제는 새로 조성된 작품을 거돈사로 옮기는 것. 스님은 마을의 장정 10여 명을 동원해 옮기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거대한 무게도 무게이거니와 다른 어떤 힘에 의해 요동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무슨 곡절이 있는 게 아닐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힘을 써도 요동도 하지 않으니 말일세.” 사람들도 무슨 변고가 있다고 생각하고 슬며시 꽁무니를 내빼 버렸다. 사찰측에서는 여간 난처한 일이 아니었다. 원공국사탑비 낙성식은 국가 차원의 큰 행사이기 때문에 시기에 맞춰 불사는 마무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스님이 고심에 빠져 있을 때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스님 한 명이 마을을 찾아와 말했다. “소납이 저 성보들을 옮겨 드리겠습니다.” “마을 장정 10여 명을 동원해도 안 되는 일을 어떻게 스님 혼자서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이름 모를 스님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다음 날 이름 모를 스님은 마을에서 제일 큰 황소를 키우는 집으로 들어갔다. “오늘 이 집의 황소를 좀 빌려야겠습니다.” 주인이 이유를 묻자 비갓과 받침대를 옮기겠다고 했다. 주인은 선뜻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나랏일이라 거절할 수 없어 걱정스런 마음으로 허락했다.
“장정 여남은도 못 옮긴 것을 우리 황소가 옮길 수 있을까….”
주인은 소에게 여물을 잔뜩 먹인 뒤 마당에 매어놓았다. 그런데 금방이라도 소를 끌로 갈 듯한 스님이 해가 지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스님은 우리 소를 빌리겠다더니 왜 이리 데리러 오지 않는 것이야?” 주인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계속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그때 이름 모를 스님이 나타났다. “주인어른, 고맙소이다. 이 집의 소를 잘 부리고 데려다 놓았으니 이젠 외양간에 넣어도 되겠습니다.”
주인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아니, 스님. 우리 소는 하루 종일 내가 빤히 바라다 보이는 마당에 매어 있었는데 누가 소를 부렸단 말입니까?”
그러자 이름 모를 스님은 껄껄 웃으면 말했다. “소납이 소의 몸은 그대로 두고 혼신의 힘만 빌려 쓰고 데려다 놓았소이다. 이제 일을 다 마쳤으니 소가 몹시 힘이 들 것이니 소 여물이나 듬뿍 주시구료.”
계속 황당한 이야기를 하는 스님의 말을 들은 주인은 마당에 매어 놓은 소를 바라다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스님 말대로 덩치가 큰 황소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황소 주인은 하도 이상해 곧 바로 거돈사로 달려가 보았다. 그 곳에는 행사준비로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고, 탑비는 이미 비갓과 받침대가 조화롭게 장엄돼 있었다. 주변에는 그것을 끌고 간 자국이 남아 있었다.
소 주인은 스님의 도력에 탄복하고 그저 비문에 절을 할 뿐이었다. 이 소문이 퍼지자 원공국사승묘탑비 제막식에는 전국에서 모인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이후부터 마을이름을 ‘비갓을 만든 곳’이라 하여 ‘비두네미’로 부르다가 행정구역 개편으로 ‘비두리’로 고쳐졌다 한다. 비두리 마을에는 지금도 당시에 조성했다는 다른 비갓과 받침대가 남아 있다.
또한 비두리 마을과 접하고 있는 지역인 귀례면 귀례리에는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석질을 자랑하는 대형 화강원석을 채석하는 ‘광옥석재’라는 회사가 지금도 운영되고 있다.
<사진> 원주시 문막읍 비두리에 전하는 귀부와 이수.
원공국사승묘탑비가 세워진 이후에도 신비한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현재 탑비의 좌측 귀퉁이(발톱)는 깨어져 나갔는데 이는 남한강을 끼고 있어 충주로 오가는 배가 계속 침몰해 이유를 찾아보니 탑비 아래 거북이 발에 걸려서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을 청년들이 밤에 몰래 와서 깨내자 이러한 사고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도 탑비의 좌측 귀부의 발톱 부위는 훼손된 채로 전해지고 있다.
원주=여태동 기자 tdyeo@ibulgyo.com
찾아가는 길 /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문막 나들목에서 나와 여주방면으로 좌회전한다. 약 1Km가량 진행하다가 다시 귀례, 부론면 방면으로 좌회전해 500여m 진행한다. 이곳에서 다시 좌측 귀례방면으로 5Km가량 진행하면 비두리가 나온다.
참고 및 도움 /
문화유산해설사 양한모씨, 원주시 문화관광과 유성선씨, 원주시 부론면 정산3리주민 유성환씨, 원주시 문막읍 비두리 이장 김기호씨와 부인 황종숙씨.
[불교신문 2496호/ 1월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