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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플스테이 사찰들의 창건설화

정조의 지극한 효심이 깃든 화성 용주사. 불교신문 자료사진
천년고찰에 깃든 인간의 아득한 꿈
갑갑한 현실에 지친 가슴 파고든다
‘스토리텔링’이 유행하고 있다. 여러 사실과 정보를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이야기로 구성하는 작업을 뜻한다. 오늘날 새로운 마케팅 방법으로 부상했다. 갑갑한 현실에 지쳐 비현실적인 신화와 미담에서 재미를 찾는 현대인들의 메마른 정서를 파고든다. 스토리텔링의 주요한 소재로 활용할 만한 것이 불교설화다. 17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불교, 천년고찰이라면 어디나 곰삭은 사연을 한두 개쯤 간직하고 있다. 상서로운 기적과 스님들의 거룩한 보살행, 이루지 못한 사랑, 하늘도 감동한 효심까지. 한국 고대문학의 효시인 불교설화는 이 땅의 사람들이 절에서 빚어낸 온갖 희로애락을 극적으로 담았다.
한국 고대문학의 효시 불교설화
상서로운 기적과 스님의 보살행
못 이룬 사랑 얘기에 효심까지
이 땅의 사람들이 절에서 빚은
온갖 희로애락 극적으로 담아
한정섭 박사가 지난 2001년 펴낸 <불교설화대사전>은 무려 2500여 개의 불교 관련 전설과 민담을 수록했다. 불교설화는 부처님이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 예로 든 이야기인 비유설화, 부처님이 태어나기 이전 전생(前生)의 다양한 선업(善業)을 담은 본생설화, 역사상의 사실에 입각해 인연을 바탕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를 가르친 인연설화와 인과설화 등으로 나뉜다. 사바세계를 8000번이나 오가며 갖가지 모습으로 나투어 갖가지 상황 속에서 중생을 깨닫게 해, 행복의 길로 안내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역사다. <삼국유사>를 비롯한 한국의 전적에는 주로 영험설화가 많이 등장한다.
템플스테이를 운영하는 사찰들은 대부분 10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사찰이다. 그만큼 절에 구전되는 설화가 많다. 특히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없는 아득한 날들의 이야기일수록 신비하고 기이하다. 사찰의 창건설화는 주로 사찰의 신성성을 위해 기능한다. 부처님의 신통력을 닮은 천고(千古)의 이적(異蹟)을 속삭이며 사찰의 창건은 필연이자 지복(至福)임을 강조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불보종찰 통도사의 창건설화가 맞춤한 예다. 지난 8월24일 하안거 해제일. 통도사에서 놀라운 광경을 접했다. 산내 암자 자장암 뒤편의 절벽 바위에서 1400년 전부터 살고 있다는 금개구리를 직접 목격한 것이다. 곡절은 이렇다. 통도사를 창건하기 전 바위 아래 움막을 짓고 수행하던 신라 자장율사 앞에 개구리가 나타났다. 스님은 개구리가 움막 앞 샘물을 더럽히는 통에 멀리 갖다버렸는데, 며칠이 지나고 보니 개구리가 샘물에서 다시 놀고 있더란다. 유심히 살펴보니 예사롭지 않았다. 여느 개구리와는 달리 입과 눈가에는 금줄이 선명했고 등에는 거북 모양의 무늬가 있었다. “불연(佛緣)이 깊구나.” 자장율사는 개구리가 샘에서 살도록 내버려두었다.
<사진>통도사 자장암 뒤편 절벽바위에 살고 있는 ‘금와보살.’불교신문 자료사진
겨울이 되어 샘물이 얼자 스님은 개구리에게 새 거처를 마련해 주려 손가락으로 바위에 구멍을 팠다. “언제까지나 죽지 말고 영원토록 이곳에 살면서 자장암을 지켜다오.” 오늘날 사중에선 이 개구리를 금와(金蛙)보살, 바위를 금와석굴이라 부른다. 불교는 국민통합의 선근이 되고 국난 극복의 선봉에 서면서 민족의 고락과 함께 했다.
밀양 표충사의 전설인 ‘땀 흘리는 사명대사 비석’엔 스님의 애민정신이 녹아 있다. 사명대사를 위해 선조는 스님의 고향에 전각을 세우고 진영을 봉할 것으로 명했다. 선조의 명에 따라 스님의 출생지인 경남 밀양에 사당이 세워지고 영정이 봉안됐다. 오늘날 표충사의 유래다. 10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당우가 퇴락하자 사명대사의 5대 법손인 남봉선사가 표충사를 중수하는 동시에 스님의 공적을 기리는 표충비를 세웠다. 그런데 표충비에서 괴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리는 것이다. 군지(郡誌)는 1894년 갑오경장 이후 한일 강제병합, 3.1 운동, 8.15 광복, 6.25 사변, 4.19 의거, 5.16 쿠데타 등 6차례로 기록하고 있다.
대구 동화사의 유래도 흥미롭다. 신라 제41대 현덕왕의 아들로 태어나 출가한 심지스님이 대구 팔공산에서 수도하고 있을 때다. 스님은 한겨울 속리산 길상사(지금의 법주사)로 향했다. 법회가 7일째 계속되던 날, 눈이 크게 내렸는데 이상하게도 심지스님이 서 있는 주변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게다가 기도 중 매일같이 지장보살의 위문을 받아 대중이 경외감으로 스님을 바라봤다. 법회가 끝나고 팔공산으로 돌아오던 중 스님은 양쪽 옷소매에 부처님의 예언을 담은 2개의 ‘간자’가 끼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팔공산으로 돌아온 심지스님은 산신들의 호위를 받으며 간자를 산마루로 던졌다. 간자가 떨어진 샘물 주위에는 때 아닌 오동나무 꽃이 눈밭 속에 활짝 피어있었다. 스님은 그곳에 절을 세워 간자를 봉안하고 절의 이름을 동화사(桐華寺)라 했다.
서울 호압사는 호랑이의 기를 꺾기 위해 세운 절이다. 호압사가 위치한 호암산(虎巖山)은 관악산의 지류로 산세가 마치 호랑이가 앉아 있는 형국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이 녀석이 나라의 앞날을 망칠 것이라 믿었다.
1394년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면서 대대적인 왕궁 축조가 시작됐다. 전국의 이름난 장인들을 총동원해 착수한 경복궁 공사는 걸핏하면 일어나는 화재와 붕괴사고로 애를 먹었다. 더욱이 상반신은 호랑이고 하반신은 그나마 형체를 알 수 없는 괴물까지 출현해 온 도시가 공포에 떨었다. 거듭되는 불운에 망연자실한 태조 앞에 어느 날 비범한 노인이 등장했다. 태조가 봉우리의 기운을 누를 방도를 가르쳐 달라고 청하자 노인은 호랑이의 꼬리 부분에 절을 세우라 했다. 그렇게 호압사가 생겼다. 노인은 왕사(王師)였던 무학대사일 것이란 추측이다.
화성 용주사는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가 창건한 절이다. 사도세자와 정조 내외의 무덤인 융릉과 건릉에 인접했다. 뒤주에 갇혀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통한을 달래기 위한 원찰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기일뿐 아니라 평소에도 자주 용주사를 찾았다. 어느 초여름날이었다. 융릉 앞 소나무에 송충이가 너무 많아 나무들이 병들어 갔다. “비명에 가신 것도 서러운데, 너희들까지 이리 괴롭혀서야 되겠느냐.” 정조는 송충이 한 마리를 잡아 이빨로 깨물어 죽였다. 그 이후로는 이 일대에 송충이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도 용주사 주변과 융릉 지역은 송림이 울창하여 장관을 이룬다.
영주 부석사와 서산 부석사는 ‘동명이찰(同名異刹)’이다. 신라시대 의상스님과 선묘 낭자 간의 플라토닉 러브를 노래한 창건설화도 같다. 선묘는 중국 유학을 떠난 의상스님이 도착 첫날 묵었던 여염집의 딸이다. 그녀는 남몰래 연모의 정을 품고 스님의 공부를 지극정성으로 뒷바라지했다. 그러나 그녀가 그토록 원하던 파계(破戒)는 성사되지 않았고 스님은 공부를 마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신라로 귀국했다. 사랑의 약자였던 선묘는 스님이 떠난 부둣가로 달려가 그대로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다. 전설에는 선묘의 넋이 용이 되어 필생의 정인이었던 스님의 여정을 지켰다고 한다. 서산 부석사 산신각에는 중앙에 산신님, 좌측에 용왕님, 그리고 우측에는 선묘낭자를 모셨다.
의상스님은 낙산사와도 연관이 깊다. 귀국 후 관세음보살이 상주한다는 양양 낙산사 앞 바닷가로 떠났다. 관세음보살을 친견하려던 스님은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렸다. 7일째 되던 날 새벽 앉았던 좌복을 바다에 띄우자 신장들이 나타나 스님을 굴 안으로 인도했다. 그러나 관세음보살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스님에게 수정염주 한 벌만 하사했다.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생각한 스님은 다시 열흘을 꼬박 정진했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관세음보살이 말씀했다. “그대가 서 있는 곳 바로 위 산꼭대기에 대나무 두 그루가 서 있을 것이다. 그 곳에다가 절을 짓도록 하라.” 스님은 그 곳이 관음의 진신이 머무는 곳이라 확신하고 터를 닦고 절을 지었다. 이 절이 관음기도도량으로 유명한 양양 낙산사다.
사찰은 종교만이 아니라 풍수학의 산물이기도 하다. 옛 사람들은 땅의 기를 보완하고 국가의 안위, 백성의 행복을 빌기 위해 절을 세우고 탑을 세웠다. 전문용어로 비보(裨補) 풍수라 한다. 사람이 아플 때 침을 꽂거나 뜸을 놓듯이, 국운이 흥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땅에 침을 꽂고 뜸을 놓은 셈이다. 곧 부처님의 위신력에 필적하는 자비와 믿음이 아로새겨진 창건설화에선 행복을 향한 인간의 끈질긴 꿈을 읽을 수 있다.
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불교신문 2657호/ 9월18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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