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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갈래로 흩어져 있어 계곡의 물줄기를 하나로 모은다는 뜻을 가진 파계사(把溪寺)는 대구 팔공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신라 애장왕 5년(804)에 심지스님이 창건한 것으로, 임진왜란을 겪으며 소실됐던 것을 조선 선조 38년(1605)부터 40년에 걸쳐 계관스님이 복원하고, 숙종 21년(1695) 현응스님 때 다시 중창됐다고 한다.

 

화려한 장식…근엄한 표정

1979년 개금 때 영조 ‘어의’ 발견

작년 엑스레이 촬영전까진 ‘木造’

천-종이로 조성한 건칠불 밝혀져

<사진> 보물 992호 파계사 건칠관음보살좌상. 사진제공 문화재청

왕실과 인연이 깊었던 파계사에는 조선 영조(1694~1776)의 탄생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진다. 영조의 아버지인 숙종은 어느 날 한 스님이 궁궐에 들어왔다가 사라지는 꿈을 꾼다. 그리고 사흘 뒤 상서로운 빛이 궐 안을 비추자 왕은 사람을 시켜 빛의 근원을 찾았는데, 그곳에서 파계사 영원스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아들을 얻고 싶었던 숙종은 스님에게 100일기도를 청했고, 왕의 부탁을 받아들인 스님은 파계사에서 기도를 올렸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아들이 영조이다. 기뻐한 숙종은 영원스님에게 ‘현응’이란 호를 내리고, 파계사 중창불사를 지원했다고 한다.

숙종과 영조는 물론 정조, 순조에 이르기까지 조선왕실의 후원이 있어, 숭유억불시대에도 파계사의 사격은 유지될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법당인 원통전(圓通殿)을 비롯해 적묵당, 2층 누각인 진동루(鎭洞樓) 등이 남아 있으며, 보물 992호로 지정된 건칠관음보살좌상 및 복장유물과 보물 1214호인 파계사 영산회상도가 전해진다.

원통전에 봉안된 보물 992호 건칠관음보살좌상은 조선시대 때 조성된 것이다. 1979년 관음보살상을 개금할 때 불상 복장에서 영조의 어의(御衣)가 발견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파계사 관음보살상은 1989년 보물로 지정된 당시부터 최근까지 나무로 조성된 불상으로 알려졌었다. 이 불상이 ‘건칠불(乾漆佛)’로 밝혀진 것은 지난 2006년이다. 불교문화재연구소가 문화재청과 진행하고 있는 사찰문화재 일제조사 과정에서 엑스레이로 촬영한 결과, 목조가 아닌 건칠불인 것이 확인됐다.

 

건칠불은 천이나 종이로 조성한 불상이다. 건칠불을 조성하는 과정을 보면, 우선 나무로 기본 골격을 세운 뒤 흙으로 기본 형태를 만든다. 그 위에 옻을 입힌 삼베나 모시로 감싸고, 코와 귀, 입, 눈 등 세부모습은 나무가루에 옻을 섞어 표현한다. 불상이 모습을 갖추면 가운데에 있는 흙으로 빚었던 기본 형태를 긁어내고, 개금으로 마무리하면 건칠불이 탄생하는 것이다. 현재 전하고 있는 건칠불이 기림사 건칠보살조상과 불회사 건칠삼존불좌상 등 극소수에 불과해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불상의 전체 높이는 108.1㎝이며 머리에는 꽃무늬가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다. 가슴과 양쪽 팔, 무릎 등 전신을 두른 영락장식은 세밀하게 표현돼 있으며, 무릎 밑에 보이는 물결무늬도 정교하다. 법의는 양쪽 어깨와 무릎으로 흘러 오른발 끝까지 이어지며, 가슴 위로 올라온 상의는 주름을 잡아 끈으로 고정시켜 놓았다. 화려한 장식과는 다르게 근엄한 표정을 하고 있으며, 곳곳에 고려후기 불상의 특징이 남아 있다.

특히 복장에서 발견된 발원문에 따르면 세종 29년(1447)에 이 보살상을 중수(重修)한다고 적혀 있어, 세종 이전에 조성됐을 가능성이 높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375호/ 11월10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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