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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국보 제35호). 통일신라.> |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국보 제35호)은 기단의 일부가 네 마리 사자가 앉은 형태로 되어 있음으로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현재 우리나라에 이와 유사한 형식의 석탑이 몇 기(基) 남아 있지만, 그 중에서도 화엄사 사사자석탑이 조형미에서 단연 뛰어나다. 특히 탑신을 받치고 있는 네 마리의 사자상은 이 탑이 일반적인 탑과는 다른 여래의 상징세계가 구축되어 있는 탑임을 암시하고 있다.
〈구례군화엄사기실(求禮郡華嚴寺記實)〉에 의하면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연기조사(烟起祖師)가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창건주 연기조사에 대해서는 범승(梵僧), 즉 인도 스님이라고만 기록하고 있을 뿐이어서 더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알 도리가 없다. 조사의 명칭은 대체적으로 ‘연기(緣起)’로 표기되고 있으나 ‘연기(烟氣)’ 혹은 ‘연기(烟起)’라고 쓴 기록도 없지 않다. 한편으로는 연기조사가 제비(燕)를 타고 우리나라에 왔으므로 ‘연기(燕起)’라고 부른다는 다소 황당한 내용의 이야기도 구전되고 있다.
사적(史籍)에 의하면 연기조사가 화엄사를 창건할 때 요사(寮舍) 겸 설법전으로서 해회당(海會堂)과 대적광전(大寂光殿)을 지었다고 한다. 창건 당시에는 화엄사가 화엄도량의 대총림으로서가 아닌 소규모의 절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창건 100여 년 후인 신라 선덕여왕 11년(642)에 신라의 자장율사가 화엄사를 크게 증축할 때 연기조사와 그의 어머니에 대한 효성을 기리기 위해 사사자탑과 함께 석등을 세웠다고 하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관련 기록의 전부다.
위엄으로 모든 악행 조복받는 獅子
8세기 통일신라양식 완연한 장엄
사자상은 탑의 한 부분이자 전체
각각 입모양 ‘A-U-M’ 音 형상화그런대 이 기록 내용에 대해서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 하나는 백제가 신라에 의해 멸망한 해가 660년이므로 자장율사가 사사자석탑과 석등을 조성했다는 642년경은 화엄사가 있는 구례가 백제 권역에 속해 있을 때인데, 어떻게 신라의 고승(高僧)이 백제 땅에 들어가 불사를 일으킬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이다. 또 하나는 우리나라에 화엄사상이 소개된 것은 자장율사가 입당(入唐) 구법을 마치고 귀국한 선덕여왕 12년(643) 이후의 일이고, 화엄의 진리가 우리 땅에 본격적으로 뿌리내린 것은 의상대사와 원효대사의 힘에 의한 것이므로, 연기조사가 화엄사 창건을 계기로 화엄의 유현한 뜻을 이 땅에 펼쳤다고 하는 것은 신빙성이 낮은 것으로 여겨진다. 역사적 사실도 사실이려니와 이 석탑이 보여주는 양식과 장엄 내용은 완연한 8세기 통일신라 양식이어서 사적에 기록된 사사자탑 조성 시기와 괴리가 있는 점 또한 의심을 품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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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발성을 하고 있는 사자상. > |
탑을 사찰 경내에 조성할 경우에 단탑(單塔)일 경우는 법당 앞쪽 마당 중앙에, 쌍탑(雙塔)일 경우에는 법당 앞마당에 좌우로 나란히 세우는 것이 통례이다. 그런데 화엄사의 경우는 이렇게 세운 동.서오층석탑과는 별도로 각황전 뒤쪽, 효대(孝臺)라 불리는 곳에 또 하나의 석탑을 세웠다. 그런데 이 3층석탑을 사적에서는 ‘칠층부도(七層浮屠)’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부도 앞에 어머니를 받들고 있는 석상이 있는데, 세속의 말로는 연기조사라 한다(浮屠前有石像戴母而立俗云烟起祖師)”고 기록한 내용을 볼 때 ‘칠층부도’가 곧 사사자삼층석탑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탑을 칠층으로 봤던 것은 지대석에서부터 상륜부까지의 층수를 모두 헤아린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적에서는 또 부도 근처에 조사의 이름을 딴 연기료(烟起寮)가 있고, 연기조사선각영당(烟起祖師先覺影堂)이라는 조사당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어 사사자삼층석탑이 보통의 석탑이 아니라 부도일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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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악천인상. > |
사사자삼층석탑은 높이가 약 7m인 이형탑이다. 2층 기단은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기본형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으나, 상층기단은 네 기둥 대신 네 마리의 사자를 배치하고 사자의 머리 위에 연화대를 얹어 갑석을 받치게 하는 독특한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 그 중앙에 합장한 승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 조각상이 연기조사의 어머니 상이라는 것이 사적이 전하는 이야기다.
탑신부에서 주목되는 것은 각 면에 문비(門扉), 인왕상, 사천왕상, 보살상 등을 여러 종류의 존상들을 조각해 놓은 점이다. 이들 조각상은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특징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하층 기단에 양각된 천인상도 탑신의 조각상 못지않게 아름답다, 보관과 영락으로 몸을 장식하고 천의를 공중에 휘날리며 앉아 있는 형식은 모두 같지만 좌법과 지물은 각기 다르다. 어떤 천인은 악기를 잡고 연주하고 있고, 팔을 벌려 춤을 추고 있는 상도 있으며, 또 다른 천인은 꽃을 받쳐 공양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천인들 모두가 불국토를 찬미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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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자.> |
사사자석탑의 아름다움이 이런 장식조각들에 의해서도 고양되고 있지만, 석탑의 장엄미와 상징 세계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네 마리 사자상에 집중되어 있다. 사자상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면 입 모양이 각각 다르게 표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탑 앞에 있는 석등에서 이 탑을 바라 봤을 때 앞 줄 왼쪽의 것은 입을 크게 벌리고 있고, 오른 쪽 것은 보통으로, 그 뒤 쪽에 있는 것은 보다 작게,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여기서 사자가 입을 크게 벌려 이빨을 드러낸 것은 ‘A(아)’ 발음, 보통으로 벌린 것은 ’U(우)’ 발음, 작게 벌린 것은 ‘M(훔)’ 발음의 표현이며,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M’ 발음 뒤에 따르는 침묵의 상태를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A’는 입을 여는 소리이며, ‘M’은 입을 닫는 소리로 일체의 언어와 음성이 모두 이 두자 사이로 돌아간다.
‘AUM’을 하나의 종자자(種子字)로 표시한 것이 자 이다. 옴자의 신비스러운 발성은 고대 인도의 베다의 찬미와 주문의 신성한 언어로부터 유래된 것이며, 그것은 창조의 완전성에 대한 표현과 긍정의 의미로 이해되는 것이다. ‘A’와 ‘U’와 ‘M’의 발음 뒤에 따르는 침묵은 궁극적인 신비의 세계이며, 그 곳에서 선험적인 법성(法性)과 일체가 되어 법성이 자아로서 체험되는 단계인 것이다.
사자상은 아니지만 ‘AUM’의 발성과 관련된 표현의 다른 예를 석굴암 석굴 안의 금강역사상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본존불을 향한 통로 좌측에 있는 금강역사는 ‘A’하고 소리를 내는 모습을 하고 있고, 우측의 금강역사는 ‘M’하며 입을 굳게 다문 채 빈틈없는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다. 입을 열고 소리를 내는 듯 한 역사를 한자로 ‘아(阿)’금강역사, 입을 다물고 있는 역사를 ‘훔(?)’금강역사’라고 부른다.
‘A’ ‘M’ 입모양은 양산 통도사의 금강계단의 신중상에서도 찾아진다. 금강계단 정면에 용의 무늬를 새긴 아치형의 석조 문이 있고, 그 문틀에 석판으로 된 여닫이 문판 한 쌍이 매달려 있는데, 이 문판에 신중상을 새겨 놓았다. 왼쪽 문의 신중은 입을 ‘A’하며 벌리고 있고, 오른 쪽 문의 것은 ‘M’하며 입을 다물고 있다. 이런 사례 외에도 동래 범어사 대웅전 계단의 한 쌍의 사두(獅頭), 제천 사자빈신사지석탑의 네 마리 사자상 등에서도 같은 입모양을 볼 수 있다.
불교미술에서 사자는 크게 두 가지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하나는 부처님의 화신으로서의 사자상인데, 부처님의 권위와 위엄으로써 외도(外道)나 악마를 제어함과 동시에 몸.입.마음의 삼업(三業)을 조화하여 모든 악행을 조복(調伏)시킨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화엄사 사사자석탑에서 보듯이 그 입 모양을 통해 법성 진리를 터득하는 단계, 즉 현실적 경험과 의식 상태, 미묘한 꿈의 의식 상태, 미분화된 의식의 자연적 상태, 그리고 법성과 일체된 자아의 상태를 단계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일체 중생은 자증과 타화를 본래 갖추고 있다는 의미를 드러내는 사자상이다.
사사자삼층석탑의 사자상은 탑의 일부임과 동시에 탑의 전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구조적으로는 탑의 한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상징적 의미 면에서는 탑 전체를 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석탑의 사자상은 탑 전체를 여래의 세계로 상징화하고 있으며, 그의 입모양을 통해 미묘한 화엄의 진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허 균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불교신문 2236호/ 6월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