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건봉사는 신흥사, 백담사 등 9개 말사를 거느렸던 한국 4대 사찰 중 하나로 신라 법흥왕 7년(520)에 아도스님에 의해 창건되어 원각사, 서봉사, 건봉사라는 이름으로 변화, 발전되어 오다가 1950년 한국전쟁 때 대부분 건물이 불에 타 완전 폐허가 됐다. 그러나 경내에는 현재 봉황 석주, 대방광불화엄경 석주, 만(卍)자 석주, 그리고 바라밀 석주 등 이색적인 석주 여러 개가 남아 있어 흥미를 끈다. 이 가운데서 바라밀 석주에 새겨진 열 가지 도형은 지금은 사라진 탑돌이 풍속-십바라밀 정진의식(精進儀式)의 잔영이라는 점에서 상징적 의미가 크다.


봉황.대방광불화엄경.卍자 석주 등도 흥미

탑돌이서 유래…석주에 새겨진 유일의 도형

10가지 의미.해인도 등 ‘석문의범’에 설명



사진설명: ? 고성 건봉사 바라밀 석주(왼쪽).
사진설명: 고성 건봉사 바라밀 석주(오른쪽).





























건봉사 바라밀 석주는 능파교를 건너 대웅전 구역으로 들어가는 초입의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높이 약 160cm 정도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네모 돌기둥 두 개에 모두 10개 종류의 도형이 음각되어 있는데, 이것이 십바라밀 정진도형이다. 오른쪽 기둥에는 열 개의 바라밀정진도형 중에서 ①, ③, ⑤, ⑦, ⑨에 해당하는 5개가, 왼쪽 기둥에는 ②, ④, ⑥, ⑧, ⑩에 해당하는 5개가 새겨져 있다. 오른쪽 기둥의 것은 각각 ①달, ③신, ⑤구름, ⑦좌우로 놓인 작은 원 두 개, ⑨네모를 둘러 싼 두 개의 동심원 형태로 되어 있고, 왼쪽 기둥의 것은 각각 ②별과 반달(상현달), ④가위, ⑥금강저, ⑧상하로 놓인 작은 두 개의 원, ⑩세 개의 작은 원이 큰 원 속에 들어 있는 모양으로 되어 있다.

십바라밀 정진도형이 이처럼 석주에 새겨져 있는 유례는 우리나라에서는 건봉사 바라밀 석주 밖에 없다. 그러나 십바라밀 정진도형 자체는 건봉사 석주에서 비로소 나타난 것이 물론 아니고 오래전부터 불교 전통의식의 하나인 탑돌이 행사에 적용되어 왔다. 지금은 사라져 볼 수가 없으나 과거에는 사월초파일이나 큰 재(齋)가 있을 때면 불자들이 등을 밝혀 들고 탑을 돌면서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십바라밀 정진의식이 성행했었다. 탑돌이는 보통 삼귀의례를 마친 후 십바라밀 정진도형을 따라 탑 주위를 돌게 된다. 예컨대 보시바라밀 정진 시에는 둥근 달 모양을 그리면서 돌고, 지계바라밀의 경우에는 반달 모양, 인욕바라밀의 경우에는 신발[鞋經] 모양을 그리면서 돈다.

사진설명: ? 십바라밀 정진도 중 가위(정진바라밀)와 금강저(지혜바라밀).
십바라밀이란 정각(正覺)을 얻기 위한 열 가지 수행법을 말하는 것으로, 십바라밀을 정진.수행하면 생사의 미해(迷海)에서 벗어나 열반의 언덕에 이를 수 있다고 불교는 가르친다. 〈대방광불화엄경〉 80권 본의 명법품(明法品) 내용을 보면, 정진혜보살의 물음을 받고 법혜보살이 방일하지 않는 열 가지 행법과 그 행법으로부터 이루는 열 가지 청정한 법을 말하고 있는데, 그 열 가지 행법이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방편.원(願).역(力).지(智) 등의 십바라밀이다.

십바라밀 정진도형의 내용은 1935년에 편찬된 〈석문의범(釋門儀範)〉의 정진도설(精進圖說) 조(條)에 해인도(海印圖)와 함께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여기서 해인도라는 것은 일명 법성도(法性圖)라고도 하는 것으로, 신라 무열왕 때에 의상조사가 당나라에 가서 지엄화상 밑에서 화엄경을 공부할 때, 스승이 원(圓)과 방형(方形) 등 여러 가지 모양으로 72개의 법계상(法界相)을 그려 문도들에게 제시하자 의상조사가 72개의 뜻을 다시 요약한 게송을 일정한 도형 속에 채워 쓴 것을 말한다. 해인도는 인도(印道 : 글자가 연속적으로 쓰인 길)가 직각으로 꺾인 인각(印角)을 54개 가진 미로(迷路) 형태로 그려져 있다. 인도를 따라 30개 구(句). 총 210글자가 시작과 끝이 이어져 끊임없이 반복되도록 되어 있다.

이 해인도와 병행하여 십바라밀 정진도형이 도설(圖說)되어 있는데, 그 모양을 들여다 보면 바라밀 석주의 것과 똑같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바라밀 석주에서는 금강저의 모양이 제 모습 그대로 표현되어 있으나 정진도형에서는 ‘H’자 모양으로 간단하게 그려져 있고, 또한 가위가 네 잎을 가진 꽃모양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처럼 모양이 서로 다르다고 해서 의미까지 다른 것은 아니다. 차이가 있다면 석주의 경우는 상징형의 실재 모양을 사실적 수법으로 그렸고, 도설의 경우는 탑돌이 할 때의 동선(動線)을 중심으로 그렸다는 점이 다르다.

그럼 여기서 〈석문의범〉의 내용을 참고로 하여 건봉사 바라밀 석주에 나타난 각 도형들의 특징과 그 의미를 해석하여 정리해 보자.

①원(圓)은 보름달을 나타낸 것으로 보시바라밀을 상징한다. 재(財).법(法).무외(無畏)의 3종 보시로써 중생심을 따라 모두 만족케 하는 것이 마치 청정 허공에 광명월륜(光明月輪)이 치우침이 없이 원조(圓照)함과 같으므로 보시바라밀을 보름달에 비유한 것이다. 달의 이와 같은 상징적 의미와 관련된 것으로 수월보살, 만월보살 등 관음보살의 화현들이 있고, 같은 뜻을 표현한 말로 ‘월인천강(月印千江)’이 잘 알려져 있다.

②반원은 반달 또는 상현달을 나타낸 것으로 지계바라밀을 상징한다. 옳지 못한 일과 나쁜 일을 하지 않으면서 정계(淨戒)를 점차 이루어 나가는 것이 마치 상현달이 어둠을 물리치고 밝음을 살아나게 하는 것과 같으므로 지계바라밀을 상현달에 비유한 것이다.

③신발[鞋經]은 인욕바라밀을 상징한다. 밖에서 들어오는 치욕을 견디어 참으면서 안으로 법성을 밝히는 것이 마치 신이 밖으로부터 찔리는 것을 방어하여 발을 안전하게 하는 것과 같으므로 신발에 비유한 것이다.

④가위(剪刀)는 정진바라밀을 상징한다. 한 곳에 마음을 쏟아 수행하는 도중에 마음을 딴 데로 옮기지 않는 것이 마치 가위로써 물건을 자름에 유진무퇴(有進無退)함과 같으므로 가위에 비유한 것이다.

⑤뭉게뭉게 피어나는 모습의 구름은 선정바라밀을 상징한다. 마음을 깊은 한 곳에 모아서 일체의 번뇌를 소멸시키는 것이 마치 많은 구름이 드리워 대지의 열염(熱炎)을 식혀, 맑고 서늘하게 함과 같음으로 구름에 비유한 것이다.

⑥금강저는 지혜바라밀을 상징한다. 지혜의 공장(工匠)으로써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의 산을 뚫고 부수어 번뇌의 광맥을 발견하고 깨달음의 불로써 단련하여 자기 불성의 금보(金寶)를 맑고 깨끗하게 하는 것이 마치 금강저의 견고함과 날카로움과 밝음이 구족하여 앞으로 나아감에 장애가 없는 것과 같으므로 금강저에 비유한 것이다.

⑦작은 두 개의 원을 수평으로 둔 것은 두 개의 샘(泉)을 나타낸 것인데, 방편바라밀을 상징한다. 방편으로 중생을 성숙케 하여 생사의 바다를 건너게 하는 것이 마치 근원이 하나인 샘을 두 개의 샘으로 나누어 동서(東西)에 두루 편하게 하는 것과 같으므로 좌우쌍정(左右雙井)에 비유한 것이다.

⑧작은 두 개의 원을 아래위로 둔 것은 앞과 뒤의 샘을 나타낸 것으로 원(願)바라밀을 상징한다. 일체의 불찰(佛刹)과 일체 중생의 바다에 큰 서원(誓願)을 가지고 편입하여 보살행을 닦는 것이 마치 앞과 뒤의 두 개의 샘에서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이 음료를 각기 얻는 것과 같으므로 전후쌍정(前後雙井)에 비유한 것이다.

⑨두개의 동심원과 그 내부의 작은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이 도형은 집과 그것을 둘러싼 견고한 담을 나타낸 것으로 역(力)바라밀을 상징한다. 일체의 불국토에 정력(正力)으로 들어가 정등정각을 이루는 것이 마치 집과 담을 수리.축성하여 밤낮으로 순시하여 외침을 막는 것과 같으므로 탁환이주(卓環二周)에 비유한 것이다.

⑩큰 원 안에 세 개의 작은 원을 그린 것은 달 속에 별이 들어 있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지(智)바라밀을 상징한다. 삼세의 일체법을 여래의 지혜로 두루 깨우치되, 가로막는 것도 없고 거리낌도 없는 것이 마치 달이 별 무리들 속에 있으면서도 멀고 가까운 곳을 다 비치는 것과 같으므로 성중원월(星中圓月)에 비유한 것이다.

사진설명: 해인급십바라밀정진도. 안진호 편 〈석문의범〉 卍상회, 1935.
그런데 지(智)바라밀 도형은 별 무리 속에 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달 속에 별이 들어 있는 형국으로 되어 있어 월중성(月中星)이지 성중월(星中月)이 아닌 듯하다. 이에 대해서 〈석문의범〉 편자인 안진호(安震湖)는 달 주변에 있는 빽빽한 별무리는 달빛에 은폐됨으로 권역 밖에는 별을 그리지 않고 달과 겹쳐 보이는 별만 권역 안에 그린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완벽한 설명이 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어쨌든 건봉사 바라밀 석주를 보고 느끼게 되는 것은 이 석주를 사찰 장식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잔영으로 남은 탑돌이 풍속을 되살려 불자들의 십바라밀 수행 의식을 보다 깊고 풍부하게 함과 아울러 훌륭한 전통문화로서 후대에 전해질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허 균/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



[불교신문 2232호/ 5월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