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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불교유적과사찰 2008. 12. 6. 11:10

석굴암

완벽한 비례로 佛國土 구현

세계 유례드문 인공석굴 연출

일제 때 훼손…1960년대 복원

세계문화유산 오른 ‘조각 백미’

석굴암 석굴 본존상.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경주 토함산 중턱에 자리 잡은 석굴암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불교유적이다. 인도나 중국에서 석굴사원을 조성한 예는 많지만, 석굴암처럼 여러 개의 판석과 돌을 사용해 인공적으로 석굴을 연출한 곳은 드물다. 석굴을 연상시키는 원형 주실에 도입된 과학적인 건축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로 칭송받고 있으며, 완벽한 비례로 조성된 본존불은 8세기 중엽 통일신라 조각기술의 백미를 보여준다.

홍익대 김리나 교수는 “석굴암은 불국토를 완벽하게 구현한 곳”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전실과 주실에 모든 불.보살상과 천부 및 나한상을 조각했기 때문이다. 입구에 해당하는 전실에는 좌우로 팔부신장이 조성돼 있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했다. 또 통로에는 사천왕상이 서 있고, 주실 벽면에는 입구 쪽부터 범천과 제석천상이 있다. 이어 문수.보현보살상과 나한상 10구가 조성돼 있으며,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십일면관음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이들 천부상과 보살상은 특히 섬세한 표현으로 더 유명하다. 바람에 나부끼듯 기울어진 옷자락이나 목걸이 장식, 겹쳐진 옷 주름이 그렇다. 사천왕상의 갑옷이나 팔뚝의 사실적 묘사도 여기에 뒤지지 않는다.

석굴암 주실 중앙에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원형 연화대에 앉아있는 본존불이 모셔져 있다. 부처님의 수인은 부처님이 보리수 나무아래서 지신(地神)으로 하여금 자신의 깨달음을 증명하게 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많은 일본인 학자들은 항마촉지인을 근거로 석굴암 본존불이 석가모니불이라 주장해왔다. 반면 황수영 박사는 아미타여래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9세기 말엽 발견된 현판에 미타굴(彌陀窟)이라는 기록이 있었고, 편액에도 수광전(壽光殿)이라고 표기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삼국유사〉 권5 대성효이세부모조(大城孝二世父母條)에 따르면 석굴암이 창건된 시기는 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김대성에 의해서 조성됐다.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은 현재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지었다고 한다.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여러 차례 중수된 석굴암이 우리에게 다시 발견된 것은 1910년을 전후에서다.

총독부에 의해 석굴암 보수작업이 진행됐는데 주실 입구 위에 위치해 환기와 통풍, 조명을 담당했던 광창이 없어지고, 원형돔을 쌓으면서 시멘트로 돌을 고정하는 바람에 누수가 끊이지 않고 습기로 이끼까지 생기는 등 문제가 끊이지 않게 된다. 이와 함께 감실의 석상 2기와 십일면관음보살상 앞에 놓여 있던 대리석 오층석탑이 사라지는 등 훼손을 겪게 된다. 일제에 의해 본래모습을 잃은 석굴암은 해방이 되고 한참 뒤인 1960년대에 이르러 다시 복원공사가 진행돼 오늘의 모습을 갖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석굴암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현재 석굴암 석굴은 국보 24호로 지정돼 있으며,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됐다.어현경 기자

[불교신문 2303호/ 2월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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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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