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사 대웅전과 약사전 |
기둥 받치고 선 裸婦像 ‘눈길’
대웅전 조선중기 사찰 건축 대표 도편수-주모 ‘사랑과 배신’ 얽혀 강화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에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372년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과 비교해보면, 비교적 이른 시기에 창건된 사찰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전등사가 역사 속에 다시 등장한 것은 고려 중기로, 그 이전의 자료는 확실치 않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선조 38년(1605)과 광해군 6년(1614)에 화재로 절이 소실되고, 광해군 13년(1621)에 이르러서야 복원됐다고 한다. 대웅전 처마에 새겨진 나부상. 보물 제178호인 대웅전은 조선 광해군 13년(1621)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앞면 3칸, 옆면 3칸의 크기로 다포양식의 팔작지붕이다. 조선중기 사찰 건축의 대표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 중 하나이지만, 사실 대웅전이 주목받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네 모서리기둥을 받치고 있는 나부상(裸婦像) 때문이다. 혹자들은 이 상이 벌거벗은 여인이 아니라 원숭이로 보기도 하지만, 전등사 대웅전의 경우 나부상이란 견해가 더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 위상에 맞지도 않는 벌거벗은 여인상을 조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도편수와 한 여인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당시 전등사 대웅전 건축을 책임졌던 도편수는 공사 도중 사하촌의 한 주막에서 주모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대웅전 불사를 마무리 하고 난 뒤 함께 살기로 약속한 도편수는 주모에게 자신의 모든 재물을 맡겼다. 하지만 공사가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여인은 도편수의 재물과 함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도편수는 자신을 배신한 여인을 찾아 응징하는 대신, 대웅전 처마 네 군데에 벌거벗은 여인 조각을 새김으로써, 영원히 대웅전 처마를 받치는 벌을 내린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한 귀퉁이만 모양이 다르다는 점이다. 3곳의 나부상이 두 손으로 처마를 받쳐 벌을 받고 있는 모양인 것에 비해 한 손으로만 처마를 받치고 있다. 또 대웅전에 봉안돼 있는 목조삼존불좌상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을 중심으로 왼쪽에 약사여래와 오른쪽에 아미타여래가 모셔져 있다. 1623년에 조성된 이 불상은 조성기(造成記)까지 갖추고 있어 17세기 전반의 조각양식과 조각승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약사전은 처마 받치는 기법 독특
<대웅전약사전개와중수기(大雄殿藥師殿改瓦重修記)>에 조선 고종 13년(1876) 대웅보전과 함께 기와를 바꿨다는 기록만 남아있는데, 건축 수법이 대웅보전과 비슷해 조선 중기 건물로 추정된다. 전등사 약사전.사진제공 문화재청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팔작지붕이며, 건물 안쪽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을 하고 있다. 이 건물은 특히 지붕 처마를 받치는 수법이 특이하여 당시의 건축수법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347호/ 7월28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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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서쪽을 보면 보물 179호로 지정된 약사전을 만날 수 있다. 중생의 병을 고쳐준다는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는 이 법당의 창건연대는 정확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