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122025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신라 명랑법사 호국의지 1000년 세월 넘나들다

(1) 사천왕사지

운이 좋았다.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 날이나 골라서 찾은 것인데 뜻밖에도 이 날 사천왕사지에서는 발굴조사 설명회가 열렸다. 사천왕사지는 2006년부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중인데 그 제2차 중간발표가 있었던 것이다. 초대받아 간 건 아니었지만 덕분에 출토된 유물과 새로 발견된 유적들을 관계자들의 설명을 들으며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발굴 현장은 꽤 폐쇄적이라 관계자가 아닌 사람으로서 환영받는 경우는 드물다. 이런 우연한 호사는 아주 드문 일이니 운이 좋다할 밖에.

신라 명랑법사 호국의지 1000년 세월 넘나들다

‘문두루비법’으로 풍랑 일으켜

당나라 군대 범접 못하게 만들어

“살생하면서까지 이뤄야 할 가치는 없어”

<사진> 발굴이 한창인 경주 사천왕사지.

사천왕사(四天王寺)는 가장 오래된 호국불교의 현장이며 최초의 호국사찰이다. 호국불교는 한국 불교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이니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이래 어느 시대 어느 사찰이 그것에 등한시 했을까마는, 역사에 이름을 올린 사찰 중 사천왕사가 가장 뚜렷한 자취를 보인 것이다. 사천왕사가 공식적으로 창건된 것은 679년이지만 창건의 단초는 675년(문무왕 9)에 시작됐다.

잠시 그때로 되돌아가보자. 660년과 668년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무너뜨리고 한반도를 통일했다. 그렇지만 아직 정세는 매우 유동적이고 불안하던 시절이었다.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에 의한 저항운동이 끊이지 않았고, 신라에 군사를 지원했던 당(唐) 역시 표변하여 신라를 압박하던 시절이었다. 675년 당은 신라를 무력 정벌하기 위해 50만 대군을 출정시켰다. 통일전쟁에 이은 이른바 나당전쟁이다. 신라는 다급해졌다. 당은 중원을 호령하는 대국. 아무래도 확실한 승산이 서지 않는다. 그 때 명랑법사가 위기를 구하겠노라고 나섰다. 그는 신유림(神遊林)이라는 숲에 임시로 절을 꾸민 다음 채색 비단으로 건물을 짓고 풀을 엮어 오방신상을 만들었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으므로 우선 이것으로 대강이나마 형식을 갖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문두루비법을 행했다.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 <삼국유사>에 따르면 당군이 승선한 함대는 출정하자마자 거센 풍랑으로 회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출전 벽두의 예기치 않은 불운으로 당군은 사기가 꺾이고 전쟁 수행의 의지마저 사그라지고 말았다. 명랑의 문두루비법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당은 신라를 공격하기보다는 자기편으로 삼는 실리정책으로 선회했다. 신라로서는 망외의 성과를 거두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4년 뒤 문두루비법을 행했던 자리에 사천왕사를 창건하였다.

그런데 명랑법사가 행한 문두루비법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도교적 주문과 인도의 토속신앙인 밀법이 복합된 주술이었을 거라고 이해된다. 문두루란 밀교의 하나로 산스크리트어 무드라(Mudra)를 음역한 것이며, 그 뜻은 ‘신의 부적’, 또는 ‘신의 약속’을 의미하는 신인(神印)이 되므로 신인종이라고도 한다. 물론 밀교 경전인 <관정경> 등에 문두루비법의 구체적 방식과 오방신에 대해 나와 있지만 어는 정도나 사실인지 단정하기 어렵다. 오방신은 동서남북의 사방과 그 중앙을 관장하는 신을 말하는데 이런 신앙은 어느 나라든 아주 오랜 옛날부터 지니고 있던 원시 신앙 중 하나였다. 어쨌든 명랑법사는 이 문두루비법을 구사하여 당의 대군을 물리쳤고, 그 주술적 행위의 현장이 바로 사천왕사라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진>사천왕사지 발굴유물들.

그런데 사천왕사지를 거닐면서 진정한 호국불교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 봤다. 아무리 국운이 걸린 통일전쟁이라고는 하지만 불교가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했다면 그것이 과연 진정한 불교일까 하는 의문이 들어서다. 살생하면서까지 이루어야 할 가치는 이 세상에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 면에서 명랑법사가 문두루비법으로 풍랑을 일으켜 당의 군대가 한반도에 발을 디디지 못하게 한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었다. 싸우지 않고 이겼으니까, 이거야말로 최고의 호국불교구나 싶다.

어쨌든 문두루비법은 이후에도 사천왕사에서 계속 이어졌다. 고려에 와서도 1074년(문종 28) 7월에 27일 동안 문두루도량을 열었다. 말하자면 문두루비법의 전문 도량이 바로 이곳이었던 셈이다. 물론 그 전에도 사천왕사에 관한 기록은 많다.

예컨대 경덕왕 시절 <도솔가> <제망매가> 등 주옥같은 향가를 지은 월명 스님이 하루는 달이 하늘 높이 걸린 날 밤 피리를 불며 사천왕사 앞길을 지나가는데 그 소리에 취한 달님이 운항을 멈추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 길을 월명리라고 불렀다. 또 9세기에는 사회가 어지러워지자 사천왕사 벽화의 개가 나와 짖거나 탑의 그림자가 거꾸로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나온다.

사천왕사는 입지조건도 매우 좋다. 뒤쪽으로 선덕여왕릉이 자리한 낭산(狼山)이 있고 앞에는 망덕사지를 감싸 안은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다. 또 왼쪽은 신문왕릉이 있는 길지이고, 오른쪽은 왕경으로 이어진다. 과연 그 옛날 ‘신이 노닐던 숲’이라는 신유림이 자리할 만한 터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숲은 본디 신비로움을 감싸고 있기 마련이다. 하늘높이 뻗은 아름드리나무들이 들어선 울창한 숲은 인간이 범접하기 어려운 신성함을 느끼게 한다. 신유림은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에는 토속신과 관련된 성지였을 테지만 불교 도입 이후로는 불교의 성지로 바뀌면서 신라 사람들에 의해 이른바 전불(前佛)시대의 7처가람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사천왕사가 이 자리에 들어선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사진> 사천왕사 금당터와 주변건물지.

발굴사무소 가건물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 있어 가보니 출토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역 전체에서 여러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압권은 흙으로 빚은 사천왕상이다. 이 사천왕상은 신라 최대의 조각가 양지(良志)스님이 만든 것이다. 흔히 신라 미술의 큰 특징 중 하나를 국제적 감각에 입각한 높은 사실성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그러한 특징에 잘 부합하는 걸작들이다.

이 사천왕상들은 모두 전돌로 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전돌을 이 정도로 화려하게 할 정도였으니 다른 시설이나 작품들의 수준이 어떠했을 지는 넉넉히 짐작된다. 발굴기한인 2010년까지 최고의 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높아 기대가 크다. 사천왕사는 임진왜란 때 폐사된 뒤 유적과 유물들이 여간 아닌 수난을 입었다. 1920년대 초 한 일본인 수집가가 서탑지를 도굴해서 사천왕 부조상과 보상화문 전돌 등의 유물들을 박물관에 팔아버렸고, 게다가 1930년대에는 절터의 금당과 강당터 사이를 가로지르는 동해남부선 철도를 내면서 본래 그 자리에 있던 비석의 좌대인 귀부(龜趺)를 지금의 남쪽 가장자리로 옮겨버리기도 했다. 그 탓에 지금 두 귀부는 뛰어난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절터 남쪽 끝자락 둔덕 바로 아래 거의 방치된 수준으로 초라하게 놓여 있다.

<사진> 비석 좌대인 귀부모습.

나는 사천왕사지에는 당군 격파의 방책과 전술이 연구되던 기구가 이곳에 설치되었던 게 아닐까 상상하곤 한다. 685년, 당의 황제는 수 년 전 풍랑으로 인해 군사작전을 수행하지 못하게 된 배경에는 사천왕사에서 행한 비법이 있었음을 알고는 사신을 보내 사천왕사를 방문하고 진상을 알아오도록 했다. 헌데 신라는 사신이 사천왕사에 가는 것을 매우 꺼렸다. 그래서 사천왕사 맞은편 자리에 급히 절을 짓고 여기를 사천왕사라고 거짓으로 둘러대기도 했던 것이다(이 절은 나중에 망덕사가 된다). 사천왕사를 보여주어서는 안 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설치된 비밀기관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발굴로 금당지와 주변 건물지가 분명하게 노출되어 절의 규모와 형태를 명확히 알게 된 것은 잘 된 일이다. 만일 그 옛날 당나라 군대를 격파할 비책을 연구하던 곳이 있었다면 어느 자리였을까. 당의 사신이 와도 결코 보여줄 수 없어 건너편에 있는 절을 사천왕사지로 둘러댔을 정도로 중요한 시설이 있었던 곳은 과연 어디였을까? 나는 최근 발굴조사 때 밝혀진 강당지 서쪽의 북편 건물지로 추정해 보았다. 이 건물지의 용도는 발굴로서도 밝혀지지는 않았다.

사천왕사지는 찾아가기 쉽다. 경주역 앞에서 불국사 방면으로 가는 버스 아무거나 잡아타서 통일전 초입에서 내리면 바로 맞은편이 사천왕사지와 선덕여왕릉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아담한 당간지주 한 쌍이 첫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경주 택시기사 중에는 의외로 사천왕사지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초행길에 이들만 믿고 가자고 하면 헤매거나 지나치기 일쑤다. 화려하지 않으면 눈길을 돌리지 않는 세태는 경주도 예외가 아니었다.

신대현/논설위원ㆍ사찰문화연구원

[불교신문 2391호/ 1월9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