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세상 꿈 품은 미륵신앙 중심도량(2) 금산사 |
섣달그믐. 파란만장했던 2007년이 마지막으로 지는 날, 중부지방에만 내린다던 눈이 예보와는 달리 호남으로 달려와 함박눈을 내려주었다. 그렇잖아도 너른 김제평야가 온통 흰 눈밭으로 변신하여 눈이 부셨다. 덕분에 찻길은 고생이었다. 서울서 아침 일찌감치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금산사(金山寺) 나들목으로 나왔지만 오는 길 내내 정체였고, 나중에 금산사를 나와 금구로 해서 전주로 나가는 길 역시 도리 없는 거북걸음이었다.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닌 터라 교통대란은 남의 일이었다. 오히려 차중에서도 느긋하게 주변 경치를 감상하거나 조용히 생각에 잠길 수 있어 좋았다. 사찰순력의 이력이 20년을 훌쩍 넘기고 있지만 역시 사찰 찾아가는 길은 게으른 여행이 최고라는 게 내 지론이다. 새 세상 꿈 품은 미륵신앙 중심도량 후백제 세운 견휜 정치입지 세운 자리 유민들 저항의식 미륵하생신앙에 반영
<사진>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인 김제 금산사 전경. 금산사의 역사를 미륵신앙에 초점을 맞추어서 살펴보자. 금산사는 8세기에 진표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은 그 이전 백제시대부터 이미 법등을 밝히고 있었다. <금산사사적>에는 599년(법왕 1)에 금산사에서 38명의 승려를 득도시켰다는 말도 있다. 그래서 금산사에서는 이 해를 창건년도로 보고 있다. 다만 김제 출신의 고승 진표율사가 8세기 중후반에 금산사를 중창하면서 더욱 유명해졌고, 이어서 미륵사상을 표방한 미륵전의 건립으로 본격적인 미륵도량으로 거듭 났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진표율사는 몸이 망가질 정도로 혹독한 신체수련이 수반되는 망신참을 행하여 미륵보살로부터 교법을 전해 받은 뒤 금산사를 중창하였고, 이로부터 우리나라 미륵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다. 고려에 와서는 1079년(문종 33) 혜덕왕사가 전국에서 손꼽는 대사찰로 중창하고, 지금의 부도밭 자리에 광교원을 두었다. 광교원에서는 미륵을 주존으로 하는 법상종의 경전 간행과 연구를 진행하였으므로 금산사를 법상종 사찰로 얘기하기도 한다. 금산사가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라는 말은, 이 공간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미륵불의 하생을 믿고 기다리면서 험한 날들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희망을 보듬어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팍팍한 세상을 참고 살아올 수 있었던 종교적 믿음의 한가운데에 금산사가 있었다는 얘기다. 흔히 사회가 안정되면 십선을 닦아 도솔천에 오르려는 미륵상생신앙이 발전하고, 반대로 사회가 불안정하면 미륵보살에 의해 구원을 기원하는 미륵하생신앙이 발전하게 된다고 말한다. 백제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한이 많은 곳이다. 사실 꼭 백제만 지칭할 것도 없이 이 지역의 정서가 대체로 그랬다. 시인 이성부는 <백제행>에서 백제민의 감성을, “죽은 듯 다시 엎디어 흙에 볼을 비벼 보세/해는 기울어/쫓기는 남편은 어찌 됐을까?”라고, 흡사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쫓기는 백제 패잔병의 아내가 읊는 것 같은 마음으로 표현했다. 물론 한 시인의 감수성 짙은 절창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 옛날 망국의 한을 남긴 백제 사람이 종교적으로 기댈 것은 바로 미륵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 미륵부처가 하생하면 이 세계는 낙토로 바뀐다. “온 세상이 칠보로 장식되고, 사람들은 온몸을 금은보화로 치장하여 보배가 땅에 떨어져 있어도 줍지 않으며, 사방은 늘 하늘나라의 음악처럼 아름다운 소리가 울려 퍼지고, 온 세상이 평화로워 원수나 도둑이 없으니 문을 잠그지도 않으며, 전쟁과 재앙이 없다. 사람들은 모두들 자비로운 마음을 갖고 있어 자식이 어버이 공경하듯 하고 어미가 자식을 사랑하듯 하며 말과 행동이 지극히 겸손하다.…” <미륵대성불경>에 묘사된 미륵부처가 다스리는 세상의 모습이다. 이 정도까지야 바라지 않더라도 그저 지금 사는 것보다는 좀 더 살기 좋았으면 바라며 사람들은 미륵부처의 하생을 염원했다. 그리고 그 염원의 한가운데에 금산사가 있었다. 백제가 신라에 통일되었지만, 200여 년이 흐른 뒤 다시금 역사의 생채기는 덧나고 말았다. 통일신라가 와해되어 후삼국으로 분열되면서 이 지역에선 수백 년 전에 없어진 백제 부흥운동이 다시금 일어난 것이다. 이때 금산사를 중심으로 다시 한 번 미륵신앙은 요동쳤다. 견훤에 의해서였다. 그는 900년 전주에 도읍을 둔 후백제를 세워 백제 부흥을 외쳤다. 그리고 민중의 마음을 한데 모으기 위해 금산사를 중시하며 미륵신앙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건히 하는데 이용했다. 이에 대해 소설가 김성동은 <미륵의 세상 꿈의 나라>에서 당시의 모습을 말하면서, “백제유민들의 저항의식이 민중종교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미륵하생신앙이다.”라고 했다. 금산사의 미륵신앙은 근세까지 이어져, 절이 위치한 모악산은 미륵신앙과 유사한 신흥종교의 집결처가 되었다. 그러자 순수한 미륵신앙에서 벗어난 혹세무민의 종교활동으로 변질되어 그 폐해가 속출하면서 미륵신앙의 이미지마저 퇴색되었다. 1966년 금산사에서 조직한 미륵정심회는 이러한 무속과 미륵신앙이 혼효를 막고 미륵신앙 본래의 가치를 회복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미륵신앙의 본산인 금산사로서는 올바른 미륵신앙 선양에 진력해야 할 책임을 하나 더 지고 있는 셈이다. 눈발이 줄어든 틈을 타서 경내 이곳저곳을 거닐어본다. 우선 미륵전 옆에 조촐하게 자리하고 있는 잣나무가 그리 높지 않은 꼭대기에 눈을 이고 서있는 게 보인다. 비록 울창하거나 무성하지는 않지만 빼놓을 수 없는 금산사 상징 중의 하나다. 달력 등에 나오는 금산사 사진 대부분은 바로 이 잣나무를 기준으로 해서 구도를 넣고 있다. 말하자면 금산사의 포토라인인 셈이다. ‘뜰 앞의 잣나무’란 말이 딱 맞아 떨어진다. 이 잣나무를 보니 생각나는 일이 있다. 꼭 10년 전 이맘때 나는 금산사에서 하루 묵은 적이 있었다. 그날도 하루 종일 눈이 펑펑 내렸었다. 한밤중 칠흑의 어둠이 내린 경내를 혼자 배회했다. 이때가 사실은 그 절에 대한 인상이 정서적으로 머릿속에 각인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런 기억은 오랫동안 잊히지를 않는다. 절 주변은 온통 눈밭이었고 게다가 휘영청 뜬 보름달에서 내려온 고운 달빛마저 반사되니 그야말로 별천지에 온 느낌이었다. 이쯤 되면 열락이 따로 없고 환희심이 멀리 있지 않다.
<사진> 미륵부처님을 모셔놓은 전각인 미륵전. 그때 이 잣나무가 그렇게 크게 보일 수가 없었다. 미륵보살이 잣나무에 앉아서 내려다보고 있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때 문득 들었었다. 금산사에는 금산사 노주, 석련대, 혜덕왕사진응탑비, 오층석탑, 방등계단, 육각다층석탑, 당간지주, 심원암북강 삼층석탑 등과 같은 국보와 보물이 즐비하다. 그 중에서도 미륵전은 금산사의 상징적 건물이라고 할 만하다. 건축적으로도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3층 건물인데 지금의 모습은 1635년에 지은 것이다.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이라고 각각 다른 편액을 걸었지만 실은 모두 미륵불의 세계를 서로 다르게 표현한 같은 말들이다. 안에는 높이가 11.82m나 되는 본존미륵불을 모셨고, 협시로 역시 8.79m나 되는 법화림과 대묘상 보살상을 두었다. 본존상은 1938년 우리나라 근대 조각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김복진(金復鎭, 1901~1940)이 석고에 도금한 불상을 다시 조성한 것인데, 시대의 고고함을 따질 필요 없이 금산사의 상징으로써 소중한 작품이다. 천왕문을 나서며 돌아가는 길에 견훤이 지었다는 견훤석성을 지나갔다. 지금은 반 토막만 남아 굴다리처럼 나지막한 지붕을 이고 있지만 예전에는 꽤 규모가 컸을 것이다. 이 석성은 금산사를 에워싸는 듯이 포진하고 있다. 금산사를 자신이 세운 유토피아의 경계로 삼으려 했던 견훤의 모습이 떠오른다. 신대현 / 논설위원ㆍ사찰문화연구원 [불교신문 2393호/ 1월16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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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를 말할 때 미륵신앙은 어김없이 한데 떠올려지는 복합어다. 미륵사상의 흔적은 호남지역에 특별히 많다. 석가모니부처님 이후 혼돈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 나타나 도탄에 빠진 사람들을 구원하는 분이 미륵부처님이다. 미륵부처는 일종의 메시아라고도 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어느 시대만을 딱 떼놓을 필요 없이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이 환영할 만한 사상이건만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백제불교가 곧 미륵불교로 등식화 되어 있다. 이런 생각에는 분명 함정이 많지만, 어쨌든 이런 일반론이 대중에게 각인된 데는 그만큼 금산사의 비중과 역할이 컸기 때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