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112024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도량은 사라져도 당간지주는 당당히 남아

강릉 굴산사지와 신복사지(1)

강원도는 묘한 곳이다. 강원도처럼 여러 가지로 이미지가 겹쳐지는 곳도 드물 것 같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산악지대이자 오지, 국토를 남북으로 갈라놓은 경계선이 꽂힌 분단의 현장이다. 여기에 남자들에게는 최전방 GOP로 상징되는 혹한의 군대 경험도 오버랩 되곤 한다. 군복무를 최전방에서 보낸 사람보다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훨씬 많건만 군대 얘기는 언제나 최전방에서 시작해서 최전방에서 끝난다. 나 역시 그랬고, 오십을 바라보는 내 친구들도 군대얘기만 나오면 아직 그 얘기다.



도량은 사라져도 당간지주는 당당히 남아

851년 범일국사 창건해 사굴산문파 개창

통일신라 말 불교의 지방화 민중화 주도



<사진> 굴산사지 당간지주. 높이 5.4m로 국내최대다. 경주에서 만들어진 여느 당간지주와는 달리 힘있고 강렬한 남성적 미를 보인다.

사람들은 강원도를 사랑한다. 여름 휴가지로 제일 먼저 꼽는 곳이 강원도 동해안이고, 또 외롭고 적적할 때도 강원도의 바닷가를 찾고 싶어 한다. 이번 여행은 10여 년 전부터 알고 지내는 디자이너 두 명과 함께 했다. 우연히 꺼낸 내 답사여행 얘기를 듣자마자 그들은 동행을 자청했다. 아니, 동행을 강권했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강원도로 가면 겨울바다를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해서다. 불교유적 탐방이 주목적이었으나 이들을 위해 강릉에서 가까운 바닷가를 추가로 넣었다. 답사에 나선 날 저녁, 구절양장처럼 휘어지는 롤러코스터 같은 도로를 몇 개인가 지나 우리는 주문진에 도착했다. 가자마자 항구의 한 허름한 식당부터 찾았다. 디자이너 둘은 바다를 좀 더 가까이 보겠다며 추위도 아랑곳 않고 가게 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바다를 바라보며 여기저기 떠 있는 등대 같은 오징어잡이배들이 환상처럼 보인다고 꿈꾸듯 말한다. 나 역시 감회가 남다르다. 젊은 날의 방랑이 시작된 곳이 바로 이 주문진항이었으니까. 20여 년 전 ‘이까(오징어)배’를 타고서 겨울 한철 내내 청춘의 열병을 저 차디찬 바다 한가운데서 식혀야 했었다. 내겐 그 시절이 환상이었다. 우리들은 폐 속 깊숙이 비릿한 바닷내음을 들이밀면서 소줏잔을 기울이며 밤늦도록 그런 얘기들을 나누었다.

강원도 중에서도 강릉과 원주는 불교문화 면에서 독특한 풍격을 갖추고 있다. 특히 신라 말 고려 초에는 다른 지역을 압도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이번 여행의 주목적은 강릉과 원주를 중심으로 강원도 지역에 우박같이 쏟아졌던 불교문화 세례의 현장을 살펴보는 것이다. 첫 행선지는 강릉의 굴산사지(堀山寺址)다.

구정면 학산리에 있는 이 절터는 통일신라 말 최고의 선지식인 범일(梵日, 810~889)국사가 851년에 창건하여 신라 구산선문 중 하나인 사굴산문파를 연 곳이다. 9~10세기 신라에서는 참선수행을 강조하는 선종이 한국불교의 대세로 떠올랐다. 그 즈음 전국에 선종을 표방한 아홉 곳의 대표적 수행집단(사찰)이 생겼으니 이것이 바로 구산선문이다. 그 중에서 사굴산문은 강릉의 굴산사를 중심으로 모인 선종 집단이다. 그리고 그 사굴산문을 연 이가 바로 범일국사다.

통일신라 후기의 불교사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 하나가 불교의 지방화가 아닐까 싶다.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대부분 거대 사찰이 수도인 경주 부근에서 건립되고 국가의 통제 혹은 적극적 간여 속에 불교가 발전해 나갔다. 하지만 9세기 이후가 되면 전국 각지에 경주의 대찰에 견줄만한 대찰이 속속 건립된다.

<사진> 굴산사지 전경. 구산선문 중 하나인 사굴산문의 중심도량. 약 50만평 정도의 넓은 대지위에 자리한다.

국가 중심, 귀족 중심에서 지방화와 민중화로 뚜렷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구산선문이란 바로 그러한 불교 지방화의 시대적 흐름을 대변하는 상징이다. 그 중 특히 눈에 띄는 곳이 바로 이 강원도 지역이다. 수도 경주에서 보자면 꽤나 궁벽지고 험한 풍토를 지닌 지역이었을 텐데 의외로 사굴산문이 성립하면서 불교가 융성했다. 당시 불교의 융성은 요즘의 선진화란 말과 한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철학, 인문학, 문학, 미술 등 각종 분야가 불교를 기반으로 해서 발전해 나갔으니 불교는 곧 가장 고급의 학문이었던 것이다. 강원도에 쏟아진 불교문화의 세례로 인해 강원도는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을 것이다.

이러한 지역적 환경은 이곳을 기반삼은 왕건(王建, 877~943)이라는 지방호족을 전국적인 인물로 키워내는 자양분이 되었고 이는 다시 고려의 건국으로 이어졌다. 그러니 사굴산문의 성립은 한국불교사에서 보통의 사건이 아닌 셈이다.

하지만 아쉬운 것도 많다. 이 같은 역사의 흐름을 뒷받침할만한 기록과 문헌이 너무나 빈약하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굵직한 윤곽만 이해할 뿐 그 안의 세밀한 점선과 면은 전혀 알아 볼 수가 없다. 굴산사의 세밀한 역사가 너무 없는 것은 물론이고 범일국사에 대한 연대기 역시 소략하기 짝이 없다. 어쩌면 역사를 기록과 문헌으로만 다루는 문헌사적 입장에서 본다면 지금 말한 게 모두 환상이요 허구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 우리에게는 그 때 남겨진 미술품이 있다. 없어진 기록 대신 미술품이 역사를 말해주고 증명해주고 있다. 비록 문자처럼 다변(多辯)은 아니나 대신 훨씬 정직하다. 문자와 달리 미술품은 거짓말을 안 한다. 그런즉 이 미술품을 통해서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아침 일찍 주문진항을 출발하여 구정면 학산리에 자리한 굴산사지에 들어섰다. 사역은 보기 드물게 넓다. 대략 50만 평 정도라고 말하지만 경계가 분명하지 않으니 더 클 수도 있다. 1949년에 일어난 대홍수는 당시 논밭이었던 이곳을 휩쓸고 지나가면서 고색창연한 옛날의 주춧돌들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오랫동안 관심에서 벗어나 있다가, 1986년에야 발굴이 되었다. 그러다 2002년 강원도 일대에 커다란 피해를 주었던 태풍 ‘루사’로 인해 다시 한 번 부분적인 발굴이 있은 다음 지금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절터에 들어서면 우선 커다랗게 솟은 당간지주 한 쌍이 눈에 들어온다. 옛날 절 입구에서 깃발을 달던 시설이다. 멀리서보면 마치 영국의 선사시대 거석 기념물인 스톤헨지같이 거칠고도 장엄한 분위기를 풍긴다. 아니, 만주 벌판에 자리한 광개토대왕비하고 비유하는 게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가까이 가보니 아닌 게 아니라 신라시대의 여느 당간지주와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한 쌍의 지주가 서로 모양도 다르고, 윗면은 굵고 아랫면은 좁다. 예컨대 분황사 앞 당간지주처럼 단정하고 예쁜, 마치 모범생 같은 풍모가 전혀 아니다. 높이 540㎝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수식이 아니더라도 크고 거칠고 우악스런 맛이 있는 선 굵은 이미지로 주변을 압도한다. 바로 이 점이 굴산사가 경주 지역의 다른 사찰과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었을 거라는 짐작을 하게 해준다.

말하자면 굴산사 당간지주가 경주 지역의 그것과 달리 이른바 지방적 성격을 보이고 있는 까닭이 굴산사의 사격 자체가 경주의 사찰과는 달랐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성립해 주는 것이다. 디자이너 둘은 이 당간지주를 본 순간 떡 벌린 입을 좀체 다물지 못하고 있다. 그들 눈에도 사진 속에서 흔히 보아왔던 얌전하고 단정한 경주의 당간지주들과 다른 그 무엇이 다가온 모양이다. 예술가들은 감각이 보통 사람과 다르게 훈련되어 있기에 그 차이를 이들이 더 먼저 알아차렸는지도 모르겠다.

<사진> 굴산사지 부도. 9세기 후반 범일국사의 부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대단해, 대단해!”를 연발하며 발길을 떼지 못하는 그들을 끌다시피 해서 저 끝에 있는 범일국사 부도 쪽으로 향했다.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어서 당간지주 있는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민가 한 채를 지나 둔덕에 올라서니 평지 한 가운데에 부도가 있다. 이 부도는 일제강점기인 1936년에 처음 조사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기록에는 조사 당시 부도 아래에 지하시설이 있었고 거기에 16나한을 모신 석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지금 상식으로는 이해가 잘 안 되는 일이다.

부도 아래에 지하시설을 별도로 둔 경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 사실 여부가 몹시 궁금하지만, 아직까지는 관련 기록을 찾아보지를 못했다. 이 부도는 창건주 범일국사의 부도일 거라고 여겨지고 있다. 부도의 형태로 볼 때 9세기 후반 국사의 입적연대와도 일치하고, 무엇보다도 이만한 조각품을 만들어 사리를 모실만한 사람으로 범일국사 외에는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디자이너들이 궁금한 게 갑자기 많아졌다. “범일국사가 누구지?”, “굴산사는 도대체 어떤 절이지?”, “이 부도에 화려한 장식이 많은 이유는 또 뭐지?” 이제 내가 대답할 차례다.

신대현 / 논설위원ㆍ사찰문화연구원

[불교신문 2406호/ 3월5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