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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감으면 천인 악단 합주소리 들릴레라…”

강릉 굴산사지와 신복사지(2)


굴산사는 영동 지방 최고 최대의 사찰이었건만 역사에 대해서는 기실 말할 게 별로 없다. 관련 기록이 너무나 적어서다. 범일국사가 창건한 것은 알겠는데, 그 다음부터는 거의 공백이다. 비록 단편적인 기록이나마 문헌학자들이 솜씨를 발휘해서 이것저것 보태다 보면 어지간히 재구성할 수가 있다. 하지만 굴산사에 대해서는 “범일국사가 창건했고, 언제 폐사되었는지 모른다”는 있으나마나 한 설명 단 한 줄에 그치고 만다.



화려하고 정교한 범일 국사 부도



웃음 띤 보살좌상 ‘고려미소’대변


<사진> 신복사지 보살좌상. 꿇어 앉아 무엇인가를 가슴께에 들고 있는 이러한 공양상은 매우 드문 형식이다.

도무지 비벼볼 언덕조차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것밖에 없어서야 말이 안 된다, 최소한 몇 줄이라도 더 보태봐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 입장에서 고려 초의 유명한 문신 최승로(崔承老, 927~989)가 지은 상소문을 참고로 삼을만하다고 본다. 여기에, “임금께서 신하를 보내어 굴산사의 승려 여철(如哲)을 맞이하시니 여철은 과연 복 받은 사람입니다”하는 대목은, 왕이 사신을 보내 맞이할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 살던 굴산사의 비중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또 1331년(공민왕 2) <경덕전등록>이라는 책을 펴낼 때 굴산사의 승려 혜식(惠湜)이 참여했음이 서문에 보이므로 적어도 이때까지는 이어져왔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조선시대에 들어와 1530년에 펴낸 전국의 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 절의 이름이 빠져있는 것으로 볼 때 이 무렵에 폐사된 게 아닐까 추정된다.

대략 이런 요지로 범일국사 부도 앞에서 두 명의 디자이너에게 설명했다. 듣기에 따라서는 어려운 이야기일 수도 있건만 이들은 사뭇 진지한 태도로 경청한다. 나는 이들의 자세에 용기를 얻어 노천 강의를 이어갔다.

“그렇다면 이런 대찰을 창건한 범일국사는 9세기를 대표하는 최고의 승려 중 한 사람이지. 15세에 출가하여 829년 스무 살 때 당나라에 건너가 당시 최고의 선사로 꼽히던 제안(濟安)스님 밑에서 6년 동안 공부했어. 847년에 귀국했을 때는 국가적으로 커다란 환대를 받았지.

이후 입적 때까지 굴산사에서 40년 동안 머물렀는데, 경문왕.헌강왕.정강왕 등 세 명의 왕이 모두 그에게 왕사나 국사가 되어 주기를 권유했으나 한 번도 응하지 않고 수도와 불경연구에만 전념했던 거야. 한마디로, 세속의 명리와 헛된 명예에 얽매이지 않은 진정한 선지식으로 존경받았던 거지. 그의 제자 중 신라불교를 대표하는 숱한 고승들이 이어졌고, 그가 세운 굴산사가 훗날 사굴산문파로 불릴 정도로 융성하게 된 것은 이처럼 다 그럴만한 까닭이 있어서 일거야.”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너무 길면 지루하고 싫증난다. 나는 이들이 하품이라도 하기 전에 서둘러 마치고서 함께 범일국사의 사리를 봉안한 부도 둘레를 한 바퀴 돌았다. 최고 선승의 부도답게 아주 화려하고 정교하게 만들었다. 특히 겉면에 새긴 부조가 놀랄 만큼 섬세하고 아름답다. 9~10세기의 부도는 땅에 닿는 바닥면이 팔각이고 그 위의 몸체는 원형을 하고 있어서 ‘팔각원당형’이라고 부른다. 몸체는 또 아래서부터 하대석, 중대석, 그리고 맨 위를 옥개석이라고 부르는데 각 부분마다 가지가지 조각을 새겨 넣기 마련이다.

<사진> 범일국사부도에 새겨진 피리부는 천인상. 적당한 살집, 세밀한 표정 등에서 이들이 합주소리가 들릴것 같다.

범일국사 부도의 조각은 특히 몸체 중간에 새겨진 악기를 연주하는 여덟 명의 천인(天人)이 압권이다. 연주하는 악기도 다 달라서 장구, 나팔, 바라, 비파, 피리, 생황, 공후, 대금 등인데 이 중 공후는 서양의 하프와 비슷한 것이다. 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제로 연주하는 포즈 그대로를 아주 실감나게 표현했다.

눈을 감으면 흡사 이들 천인 악단의 합주 소리가 들릴 것도 같다. 이만한 조각을 갖춘 부도는 찾아보기 어렵다. 강릉 단오제 때 모시는 ‘대관령 국사 성황당신’이 바로 범일국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 지역에서는 전설적인 인물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미술계에서 하는 이야기 중에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미술 감상은 수학과 달라서 공식(이론)에 대입하면 나오는 답(감상)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가 아름다움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또 어떤 작품이 나타내는 상징성과 의미를 알아야 비로소 거기에 감추어진 아름다움을 깨닫게 된다. 나는 동행인들에게 부도의 각 부분을 손으로 하나하나 짚어가며 그 의미와 상징을 설명하니 전문지식이 없는 이들도 어느 정도 이해되는 모양이다. 아래위로 끄덕거려지는 턱이 좀체 멈출 줄 모르고 입에서 탄성이 연신 쏟아져 나온다.

<사진> 신복사지. 현재 삼층석탑과 보살좌상이 남아 있다. 보살상은 불사리가 봉안된 석탑을 향해 공양하는 자세를 하고 있다.

이제 굴산사지 탐방은 이쯤 해두고, 슬슬 신복사지로 갈 차례다. 신복사지(神福寺址)는 시내에서 그다지 멀지않은 내곡동에 있어 쉽게 찾아갈 수 있다.

굴산사와 마찬가지로 범일국사가 창건하였고 입지조건도 평지이지만 규모 면에서는 차이가 많이 진다. 하지만 여기엔 현재 굴산사지에 없는 중요한 유물 두 점이 있다. 바로 삼층석탑과 보살상이다. 이들은 각각의 분야에서 고려를 대표할 만한 작품들로서, 굴산사와 더불어 강릉지역 불교문화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동행인들은 여기서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 이처럼 독특하고 빼어난 미술품이 이런 궁벽(?)한 곳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그 옛날 신복사가 굴산사와 연계되어 강릉의 불교를 이끌었을 위용이 눈에 선하다. 신라 말 고려 초에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혔던 강릉 지방의 불교문화의 위세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고려 석탑의 조형미 중 걸작에 속하는 삼층석탑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이 보살좌상은 고려 조각이 왜 아름다운가를 잘 말해준다. 왼쪽 다리를 세우고 오른쪽 다리를 꿇어앉은 자세로 석탑을 향하여 공양하는 자세에 두 손은 가슴에 모아 무엇인가를 잡고 있다. 원통형의 높다란 관을 쓰고 있는 얼굴은 풍만하며 만면에 웃음을 띤 아주 사실적인 작품이다.

한편으로는 경주 지역의 조각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그런 따스함까지 보인다. 이런 형식의 보살상은 우리나라에 몇 점 없다. 보물 제87호인 이 보살상의 지정명칭은 ‘신복사지 석불좌상’. 엄연히 보살상임에도 불상으로 명명되어 있다. 명칭이나 내용설명에서 잘못된 불교문화재가 한둘이 아니건만 문화재청이나 종단에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신라 말 고려 초, 강릉을 비롯한 동해안의 불교문화는 어떤 것이었을까? 사실 강릉을 비롯한 삼척, 동해 등의 지역은 고려 때부터 왜구의 침략에 시달림을 많이 당한 곳이다. 또 통일신라 후기부터 고려가 건국되는 이른바 후삼국시대라는 혼돈의 시대에서는 치열한 전장이 되기도 했다. 자연 백성들은 극심한 피해를 받았고, 현세도피적이 되었으며, 그런 까닭에 이 지역의 주민들은 미륵신앙에 몰입하게 되었다는 게 불교사 책에 나온다.

하지만 나는 좀 다르게 본다. 이들은 혼돈을 혼돈으로만 여기지 않고 보다 큰 세상이 열리는 기회로 삼았을 것이라고. 그렇지 않고서야 광대무변한 굴산사에 세워진 원초적 힘이 넘치는(마치 솟대와 같은) 당간지주, 정교하기 짝이 없는 범일국사 부도, 그리고 환희에 넘치는 신복사지 보살상과 장엄한 석탑 등이 나타난 배경을 설명할 길이 없다. 굴산사지와 신복사지, 그리고 여기에 있는 이 작품들은 매너리즘에 빠진 불교를 새롭게 일구어낸 고려 불교의 현장이라고 보는 것이다.

답사가 끝난 며칠 뒤 서울에서 만나 뒤풀이를 겸한 자리에서 동행 중 한 명은 이렇게 고백했다. “이번 답사는 개인적으로 참으로 인상적인 여행이었어. 나는 불교미술 하면 석굴암이나 불국사 다보탑이 최고인줄만 알았는데, 그와는 다른 차원의 탑과 불상이 전국 도처에 있는 줄은 몰랐던 거지. 자네가 애써 말한 ‘강릉 지방의 독특한 불교문화’ 등등은 솔직히 무슨 말인지 잘 몰라. 하지만 우리나라 불교문화의 저력이 만만찮다는 것은 이번에 제대로 배운 것 같아.”

나는 강원도는 한국불교의 아마존과 같은 곳이라고 생각한다. 광활한 미지의 숲이 펼쳐져 있고 그 안에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황금의 나라가 존재할 것만 같은 그런 곳. 한편으로는 잘 아는 것 같지만 막상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우리에게 미답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그런 곳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신대현 / 논설위원·사찰문화연구원

[불교신문 2408호/ 3월12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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