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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원공.지광국사 법향기 절터에 ‘가득’

원주 거돈사지와 법천사지

주문진과 강릉까지 동행했던 두 디자이너와는 강릉을 나오면서 헤어졌다. 그들은 서울로 돌아가고, 나는 혼자 원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여정을 끝까지 함께 못하고 헤어진 것은 모처럼 찾은 겨울바다인데 이대로 떠나기 아쉽다며 경포대에서 하룻밤을 더 보내느라 예정된 날짜를 넘겼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함께 다니는 게 슬슬 피곤해졌기에 그들이 먼저 돌아간다고 할 때 말리지 않았다. 매번 느끼는 일인데, 어지간히 가까워도 3일 이상 함께 여행하다보면 서로 불편해지곤 한다. 아침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며칠씩 함께 하다보면 할 말도 더 없어지고 따분해져 버리는데, 내 천성이 남하고 같이 오래 못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고독을 자초하는 고약한 성격이 아닐 수 없지만, 그것도 천성인 바에야 어쩌겠나. 여행은 혼자 하는 게 참맛이라고 스스로 위로해볼 뿐이다.

고려 원공.지광국사 법향기 절터에 ‘가득’

고색창연 3층석탑 탑비 옛 명성 대변

지방불교 꽃피운 흔적 곳곳에 남아

<사진> 원주 거돈사 전경. 드넓은 터에 삼층석탑, 불대좌, 원공국사탑비 등이 들어서 있다.

원주는 거돈사지와 법천사지가 목적지다. 원주 터미널에서 부론면까지 버스로 이동하고, 여기에서 택시를 타고 거돈사(居頓寺)터로 갔다. 법천사는 고려시대 초 원주의 대표적 거찰로, 약 2만6446㎡(약 8000평) 정도로 확인된 절터에 삼층석탑을 비롯해서 원공국사의 부도탑비, 당간지주 등이 남아 있다. 이들은 모두 고려 불교미술을 대표하는 걸작들이라 옛날 거돈사의 위상을 알게 해준다.

사실 거돈사의 역사에 대해서는 관련기록이 별로 없다. 만일 이 유물들마저 없었다면 거돈사의 실체도 몰랐을 게다. 한림대학교의 발굴을 통해 건물지며 주춧돌들이 드러나 있다. 절터 중앙으로 가보니 금당터가 있고 그 한가운데에 불상을 올려놓는 대좌가 놓여 있다. 황량한 터에 쓸쓸하게 풍상을 겪고 있지만 처음에는 이 위에 당당하고도 아름다운 불상이 앉아 있었을 것이다. 대좌의 높이만 2m가 넘으니 그 위에 올라앉았을 불상의 웅대한 모습은 상상되고도 남는다. 비록 지금은 주인을 잃었지만 그 옛날 대중들을 내려다보고 있었을 부처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금당터 앞에는 고색창연한 삼층석탑이 우뚝 자리해 있다. 이 삼층석탑은 일반 석탑과는 달리 토단을 마련하고 3단의 장대석을 가지런히 쌓아 사각형 단을 만든 다음 그 위에 탑을 세운 점이 특이하다. 아마도 강원도 지역의 특색인지도 모르겠다. 삼층석탑에서 북쪽으로 약 50m쯤 가니 원공국사의 탑비가 있다. 이 탑비는 원공국사의 일대기를 적은 비석이다.

용의 머리를 한 거북을 조각하고 그 위에 비석을 얹은 9~10세기 승려탑비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용두의 사실적인 표현과 역동감 있는 표현 등에서 고려 초기 탑비의 최고봉으로 꼽힐 만한 작품이다. 탑비의 주인공 원공국사(930~1018)는 고려 초기의 유명한 학승이다. 959년 중국에 유학하여 천태학을 배웠으며, 970년에 귀국할 때까지 그곳에서 공부하는 한편 <법화경> 등을 강의하며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귀국 후 왕사와 국사로 추대되었고, 1018년 거돈사에서 입적하였다. 고려의 다섯 왕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던 스님은 한때 맥이 끊어졌던 천태학을 다시 계승한 천태학의 명수였다. 이러한 거장이 거돈사에서 입적한 것으로 보아 이 절은 고려 초기 천태종의 대표사찰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사진> 법천사 부근 법천리 고분군에서 발견된 중국 청자. 원주 지역의 선진성을 상징한다.

이 탑비 옆에는 부도가 있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이미 폐사된 터라 아무도 거돈사를 돌보지 않는 틈을 타 와다(和田稔)라는 일본사람이 멋대로 해체해서 서울의 자기 집 뜰로 가져갔다. 고려의 대학승의 부도가 한낱 일본인의 정원을 장식하는 석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해방이 되고 1948년에야 환수하기는 했으나, 제자리인 거돈사까지는 가지도 못하고 경복궁으로 옮겨지는 데 그치고 말았다.

몇 년 전 경복궁에 있던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전함에 따라 지금은 용산에 있다. 아무리 박물관 내에 있다한들 강원도를 대표하는 국보가 기구한 운명 탓에 제자리를 떠나 천리 타지에 가 있는 게 결코 잘 된 거라고 할 수 없다.

원주의 뜻있는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이 원공국사 부도탑을 제자리로 다시 옮겨 줄 것을 요청해왔었다. 당국은 문화재보호법을 들어 오불관언으로 일관하다 작년 11월 진품은 그대로 두고 복제품만 거돈사지에 세우는데 동의했다. 문화재는 제자리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고 가치도 있다. 복제품은 아무리 잘 만들어도 결코 진품과 견줄 수 없다. 수몰지구도 아니건만 제자리에 원상복귀 시키는 게 가장 훌륭한 문화재 보호책임을 왜 모르는 것일까?

거돈사지를 나와 다시 택시를 불러 법천사지로 향했다. 가는 도중 원주에서 활동하는 사진작가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가 원주에 온 것을 알고는 찾아오겠다고 전화 온 것이다. 나는 완곡하게 사양했다. 그가 늘 바쁜 것을 잘 알고 있는 터에 일부러 시간 내게 하는 게 미안하기도 했고, 또 모처럼 혼자 나선 호젓한 여행길을 방해받고 싶지도 않았다. 이렇게 원주 여행은 혼자서 다녔지만 결국 나중에는 그에게 신세를 지고야 말았다. 서울에 돌아와 글을 쓰기 위해 사진을 꺼내보니 내 낡은 카메라가 기어코 탈을 내 파일이 다 손상되어 있었다. 할 수 없이 그 사진작가에게 거돈사지와 법천사지의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바쁜데 심부름이나 시킨다는 타박은 감수해야 했다. 차라리 그 때 함께 다녔으면 좋았을 걸.

법천사(法泉寺)터는 부론면 법천리 명봉산 자락에 펼쳐져 있다. 아직 발굴이 진행 중이라 거돈사와는 달리 정돈된 맛은 없다. 법천사는 일찍이 725년에 창건되었지만 고려 문종 때 지광국사(智光國師, 984~1067)가 머물면서 비로소 거돈사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강원도의 대찰이 되었다. 조선 초기에도 명성을 이어갔는데, 유명한 학자인 유방선(柳方善)이 이곳이 좋아 머물 때 한명회(韓明澮).서거정(徐居正).권람(權擥) 등이 찾아와 그에게서 배웠다. 이들은 모두 훗날 내로라하는 대학자들이 되었으니 법천사는 한편으론 조선 초기 유학의 산실이기도 한 셈이다. 이곳 삼층석탑에는 그들의 이름이 새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된 뒤로 중창되지 못한 것 같다.

절터에는 금당 북쪽에 지광국사의 탑비를 비롯하여 불상과 광배, 불두 등 가지가지 석물들이 있다. 또 지광국사 탑비 옆에는 지광국사의 부도가 있었는데, 1910년 이후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해방과 더불어 반환되어 서울 경복궁 뜰에 놓였고 지금은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 뜰에 보존되어 있다. 앞서 본 거돈사지의 원공국사 부도탑과 비슷한 수난을 당한 것이다. 거돈사지의 원공국사 부도나 법천사의 지광국사 부도, 그리고 또 다른 사찰문화재들이 박물관 뜰이나 장식하는데 그치지 말고 본래의 절터로 돌아오는 방법이 없을지 궁금하다.

사실 불교사나 불교미술사 하는 사람들은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게 하나 있다. 법천사가, 그리고 이 지역이 고려시대에 중요한 지역이었음은 법천사뿐만 아니라 법천리에서 출토된 청자로도 확인된다는 점이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양(羊) 모양의 청자가 있다. 이것은 법천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것인데 4~5세기에 중국에서 만든 것이다. 중국에서도 보기 드문 명품이다. 이를 통해 원주 지역이 일찍부터 중국의 문물을 독자적으로 흡수했을 가능성이 점쳐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같은 선진성이야말로 이곳의 불교문물이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히 발전하게 된 토양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거돈사와 법천사 외에 고려시대 원주 지역에는 법흥사라는 거찰도 있었다. 뿐인가, 구룡사를 비롯해 석남사.국형사 등의 고찰들도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시대에 걸쳐 번성했던 원주지역의 불교문화를 보여주는 단초들이다. 신라시대 경주에 집중되었던 불교가 고려에 들어와 국토의 전 지역으로 뻗어나갈 때 원주 일대는 불교가 특히 발전한 곳 중 하나였다.

이 지역에는 또 통일신라기에 풍미했던 신선술이나 도참사상과 연관된 유적들이 전해온다. 불교와 더불어 이 같은 새로운 문화의 발현은 곧 원주와 강릉을 비롯한 강원도가 다른 지역과 달리 문화적 흡인력이 강했었던 곳이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강릉의 굴산사와 신복사, 원주의 거돈사와 법천사 등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신대현 / 논설위원.사찰문화연구원

[불교신문 2410호/ 3월19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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