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문무왕릉조사단이 감포 앞바다에 떠 있는 작은 바위섬이 바로 문무왕릉의 수중릉이라는 발표를 하자 국민들은 커다란 관심을 보였다. 세상에 불가사의하고 신비로운 일이 많다지만 이렇게 진귀한 예는 그리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 유일의 수중왕릉이 아닌가. 게다가 문무왕이 죽어가면서 말한, 자기는 죽어서 바다 속의 용이 되어서라도 백성을 괴롭히는 왜구가 침범하지 못하게 지키겠노라는 유언도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 애국애민의 정신에 감격한 것이었다. 당시 우리 국민들은 애국에 죽고 애국에 살던 시절이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
아들 신문왕 부왕릉 참배했던 이견대는 어딜까
어쨌든 이 일로 인해 사람들의 관심은 증폭되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렇다면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바다 한가운데에 능을 마련한 신문왕이 부왕의 능을 참배하는 장소로 지은 이견대(利見臺)는 어디일까 하는 데까지 관심이 이어졌다.
그런데 그 정확한 위치가 기록에 나와 있지 않는다. 수중릉이 잘 바라다 보이는 바닷가 근처였으리라는 것 외에는 알 수가 없다. 1960년대 후반 지금의 이견정 자리가 바로 그곳이 아닐까 하고 건물도 지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지극히 회의적이다. 당시 발굴도 해봤지만 신라시대 유적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사진> 이견대로 보이는 산상에서 바라본 문무왕릉. 바닷가에서 바라본 것보다 훨씬 조망이 좋아 이곳이 이견대가 있던 자리임을 짐작하게 해준다. 아래는 이견대로 보이는 산상.

이견대가 아니라 조선시대 역원(譯院)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보다는 길 건너 산 위가 원래의 이견대 자리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당시 지금의 이견정 자리를 <삼국유사>에 기록된 이견대로 추정했던 황수영 박사가 오히려 가장 적극적으로 이러한 산상설(山上說)을 주장하고 있다. 지금 나는 바로 그 산상의 이견대 자리로 가고 있다.
이견정 바로 뒤, 경주로 가는 929번 도로와 나정 방면으로 뻗어있는 31번 도로가 만나는 길을 건너면 바로 대본초등학교다. 학교 정문 옆으로 난 조그만 산길을 따라 10분 쯤 올라가니 앙상한 가지만 남은 겨울나무들 사이로 일군의 돌무지가 기다랗게 옆으로 이어진 것이 보인다. 한눈에 봐도 아무렇게나 놓인 돌들이 아님을 알겠다. 무너져있기는 해도 나름대로 정연하게 포개져 있는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과연 인위적으로 쌓은 석축이다. 그것도 몇 백 년 전 조선시대의 것도 아니고 그보다 훨씬 오래 전의 천년도 넘은 신라시대 석축이다.
대학시절 삼년산성이며 온달산성이며 틈나는 대로 전국의 신라시대 성곽을 찾아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역마살 탓이었을까. 어쨌든 그 때 길러진 안목이 여기서 쓸모를 발휘한다. 좀 더 올라가보니 그 위에 또 다른 석축이 놓여 있고, 그 위에도 한 단, 이렇게 모두 3단으로 쌓여있다. 마지막 석축을 딛고 올라서니 평평한 대지가 나왔다. 일부러 다듬기 전에야 산속에 이런 대지가 저절로 생길 리 없다. 그렇다면 바로 이곳이 이견대지일 터였다. 주위를 살펴보니 한 50평 가량 되는 대지에 근래에 세운 무덤 2기가 앞뒤로 자리 잡고 있다.
바로 이곳이 이견대 자리구나 하며 다소 열띤 마음으로 주변을 거닐었다. 그 옛날 초석으로 썼음직한 다듬은 돌 몇 개가 뒹굴어 있을 뿐 일대는 온통 풀밭 천지라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되어 있었음이 한눈에 드러난다. 한가운데에 서서 동해를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일망무제! 시야가 확 트여있다. 문무대왕릉이 여기보다 가까운 이견정에서 바라본 것보다 훨씬 더 또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이견대 자리로써 이보다 더 적당한 곳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시야도 좋고, 또 여기라면 어림짐작해서 앞면 5칸, 옆면 3칸짜리 누각이나 건물이 들어서기에 넉넉할 것 같다. 뒤를 돌아서서 좀 더 산 쪽으로 가보니 둔덕을 하나 사이에 두고 역시 평지가 나 있다. 이견대 부속 건물이 있었음직한 자리로 보인다. 이 자리에서 아래를 바라보니 유장하게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대종천 물줄기가 햇빛에 반짝거리고, 그 앞으로는 감은사지가 시야에 들어온다. 과연 이 자리가 이견대지일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적당한 기회에 발굴이 이루어져 보다 확실하게 증명될 수 있으면 좋겠다.
현재 이견정을 원래자리로 보기엔 회의적
추정 당사자인 황수영박사는 산상으로 생각
이견대로 추정되는 이 자리에서 능선을 따라 내처 가면 기림사까지 길이 이어진다. 신라시대의 통행로일 것이다. 감은사가 다음 행선지이므로 바라보기만 하고 발길을 돌려 내려와 국도변을 따라 감은사(感恩寺)로 향했다. 감은사는 문무왕 생전에 짓기 시작했으나 그는 완공을 못보고 승하하고, 682년 신문왕이 부왕의 뜻을 이어 완성했다.
절 이름을 ‘감은사’로 지은 것은 죽어서도 동해의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은혜에 감읍’한다는 뜻이니 이는 곧 문무왕에 대한 헌사에 다름 아니다. 그러기에 <삼국유사>에는 금당 아래에 용혈을 두어 용이 된 문무왕이 해류를 타고 출입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황당한 얘기 같겠지만, 1967년 절터가 발굴될 때 실제로 금당 아래에서 용혈에 상당한 유구가 나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적어도 당시 신라 사람들에게는 용이 된 문무왕은 현실이지 신화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진> 감은사 동탑. 동서 쌍탑에서 각각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리장엄이 발견되었다.
감은사지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삼층석탑 2기가 동서로 나란히 서 있다. 창건 때 세웠으니 무려 1300년이 넘은 고탑이다. 지금 서탑은 한창 보수 중이라 커다란 장막이 씌어져 있다. 1966년 서탑이, 1996년 동탑이 수리될 때 각각 전각(殿閣) 형태의 사리장엄이 나왔다. 나는 감은사 사리장엄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리장엄이라고 생각한다. 서탑에서는 사리 1과가 나왔고 동탑에서는 사리 10여 과가 나왔다. 서탑의 그것이 진신사리로, 그리고 동탑의 사리는 아마도 문무왕의 사리가 아닐까 추정하기도 한다.
제법 추운 날씨임에도 감은사지에는 중학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모여 있다. 방학 중 현장탐방 과제 해결 차 부모와 함께 나온 모양이다. 몇 명씩 짝지어 절터를 둘러보고 있는데 그 중 두 학생 옆으로 다가가 봤다. 한 학생이 곁에 선 친구에게 묻는다.
“여기, 어때?”
“뭐, 별로 볼 것 없네.”
“그렇지? 여기가 왜 유명한지 모르겠어.”
용이 된 문무왕의 신화도, 지하시설의 유구도, 신라에서 가장 오래된 삼층석탑 2기도 어린 학생들에게는 별 볼일 없는 곳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나는 순간 쓰디 쓴 비애감을 느꼈지만, 이걸 학생 탓으로 돌릴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의미 깊은 유적인들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주지 않으면 한낱 썰렁한 폐허로밖에 보이지 않을 테니까. 감은사지에는 관람자를 위한 친절한 안내를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다. 감은사의 역사를 몇 줄로 간략하게 적어 넣은 안내판 하나가 고작이다. 천편일률적인 형태의 무성의한 안내판 하나로써 모든 설명이 다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절 구석구석의 묵은 때 하나까지 자세한 설명이 담긴 그런 안내판이 있어야 한다.
장구한 역사 중에는 역사와 신화가 한데 섞여 있음을 종종 보게 된다. 역사와 신화가 하나로 이루어져 구분이 되지 않고, 또 굳이 구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그런 경우다. 역사는 지혜를, 신화는 꿈을 선사한다. 이 둘이 서로 대립되는 불편한 존재는 아닌 것이다. 어쩌면 신화와 역사를 굳이 구분해서 나누려는 것도 사람들의 얄팍한 앎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문무왕릉, 이견대, 감은사 모두가 동해 바닷가 입구에 자리하니 이들을 묶어 동해구(東海口) 삼대유적이라 부를 만하다. 한국미술사의 비조 고유섭 선생이 일찍이 ‘경주에 가거든 문무왕의 위대한 자취를 찾으라’고 갈파 했던 곳이 바로 이 동해구였다. 좀 더 넓게 보면 기림사와 장항리사지도 포함시킬 수 있다. 토함산 석굴암 대불이 바라보고 있는 곳도 바로 이 동해구 언저리다. 여기에는 신라의 통일영주이자 불교수호의 화신인 문무왕의 넋과 자취, 위대한 불교국가 건설의 꿈을 실현하려 한 신라인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정도면 신화와 역사가 한데 어울려 숨 쉬는 현장으로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라도 등재할 만하지 않을까?
신대현 / 논설위원.사찰문화연구원
[불교신문 2402호/ 2월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