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 초석놓은 호법신장으로 ‘추앙’문무대왕의 유적(1) |
1월25일. 갑자기 몰아닥친 추위로 전국이 꽁꽁 얼어붙었다. 기차에서 내려 막 들어선 구포역 대합실 한쪽엔 텔레비전 화면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아마도 역 부근의 시장 사람들까지 몰려든 눈치다. 무슨 중대발표라도 있는가 싶어 다가가 힘껏 까치발을 하고 올려다보니 가수 나훈아가 자신에 관한 괴소문을 해명하는 기자회견이다. 헛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사람들 틈을 비집고 밖으로 나와 친구인 J화백을 기다렸다. 저만치 그가 반갑게 손짓하며 다가온다. 헌데 예술가도 시중의 연예 소식은 빠뜨릴 수 없는지 J는 운전석에 앉자마자 나훈아 얘기부터 꺼낸다. 그의 부박함이 가소로웠지만, 오늘 차를 신세지는 입장이라 순조로운 탐방을 위해 잠자코 지도만 꺼내들었다. 일정은 문무대왕 유적을 찾아 경주 대왕암과 이견대를 들러 감은사지까지 가는 것으로 잡았다. 헌데 그 전에 먼저 꼭 들러볼 곳이 있다. 경주 감포가 아니라 울산 앞바다에 또 다른 대왕암이 있어서다. 문무왕의 수중릉이 두 곳에 있지는 않을 터인데 울산 대왕암은 과연 무엇인가. 삼국통일 초석놓은 호법신장으로 ‘추앙’ “나는죽어 나라 평화 지키는 용 되리라”유언 아들 신문왕 이견대 올라 그리움 달래기도
사진설명 : 겨울바다 백사장에서 바라본 경주 대왕암. 문무왕의 유골이 안장된 수중릉으로 불교식의 사리 장치가 있을것으로 추정된다. 울산시내로 들어와 해변에 자리한 울기공원으로 향했다. 이 안에 대왕암이 있다. 1904년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세워진 울기등대가 있는 공원 입구를 지나 대왕암까지 걸어가는 길은 훌륭한 산책로이기도 하다. 100년이 넘는 울창한 솔밭 샛길을 걸으니 저절로 가슴에 시원한 공기가 차오는 것이 느껴진다. 울산 대왕암은 경주 대왕암보다 수십 배는 더 큰 바위로 바닷가 바로 코앞에 잇대듯이 놓여 있다. 바닷가라고는 하지만 모래사장이 없고 절벽 끝으로 바로 바닷물이 넘실댄다. 대신 동해의 푸른 물이 한눈에 들어오며 시야가 시원하게 트여 있어 여간한 절경이 아니다. 육지에서 바위까지 철제도로가 나 있어 쉽게 건너가볼 수 있지만, 그 때문에 바위의 전체 모습이 가려지는 흠도 있다. 놀러온 남녀 일행이 모여 있다가 지나가는 우리더러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한다. 사진은 J가 찍고, 나는 일행이 한쪽으로 모이는 틈을 타서 얼른 대왕암의 전경을 찍었다. 오늘 J는 운전기사에 사진기사까지 겸하느라 수고가 많다. 그런데 왜 이 바위를 대왕암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아마도 이 바위의 모습이 영락없는 용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과 연관된 것 같다. 전설에는 문무왕이 아니라 문무왕비가 앞서간 문무왕처럼 동해의 호국용이 되어 이 바위에 잠겼다고 한다. 바위의 모습이 용을 닮다보니 죽어서 용이 된 문무왕의 경주 대왕암과 연관되어서 이곳을 왕비의 능으로 부연시켜 나온 전설인 것 같다. 그렇지만 그것 말고도 여기를 대왕암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또 있지 않을까 싶다. 바위에 올라 위에서 내려다보니 아닌 게 아니라 한쪽에 나있는 단애로 물길 들어오는 광경이 경주 대왕암의 그것과 흡사했다. 또 이 바위 앞쪽으로 십 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작은 바위섬이 하나 있는데 이 역시 모습만 보면 경주 대왕암과 아주 비슷하다. 아마도 이러한 연유 등으로 해서 이 바위를 ‘댕바위’, 곧 대왕암이라 불렀던 것 같다. 하지만 경주 대왕암에는 바닷물이 드나들도록 만든 인공의 수로, 유골 안장을 위해 마련한 바위 한가운데 움푹 팬 공간 등 능으로서의 특징이 있지만 이런 것이 이곳에는 보이지 않는다. 울기공원을 나와 다시 차를 몰아 드디어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감포 앞바다에 도착했다. 모래사장에 서니 문무대왕암이 아주 가까이 바라다 보인다. 바닷가에서 불과 20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헤엄을 쳐도 될 것 같지만 실은 어지간히 파도가 잔잔하지 않고선 배 타고 건너가기도 어렵다. 예전에는 대왕암까지 관광객을 배로 실어 날랐는데 요즘은 안전 때문에 통제하고 있다. 그만큼 보기보다 파도가 억세다는 뜻이다. 그나저나 문무왕의 능은 하필 바다에 떠 있는 바위섬에 마련된 것일까? 그 해답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그의 유언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 강토는 삼국으로 나누어져 싸움이 그칠 날 없었다. 이제 삼국이 하나로 통합돼 한 나라가 되었으니 백성들은 평화롭게 살게 될 것이다. 허나 동해로 침입하여 재물을 노략질하는 왜구가 걱정이다. 내가 죽은 뒤 용이 되어 불법(佛法)을 받들고 나라의 평화를 지킬 터이니 나의 유해를 동해에 장사지내라. 화려한 능묘는 공연한 재물의 낭비이며 백성을 수고롭게 할 뿐 죽은 혼은 구할 수 없다. 내가 죽고 열흘 뒤에 화장할 것이며 검약하게 행하라.” 위민정신의 극치요 불법 준행의 모범이 아닐 수 없다. 문무왕이 위대한 점은 삼국통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백성과 불교수호를 위한 단심(丹心)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문무왕의 그 단심을 가장 극명하게 상징하는 게 바로 이 수중릉일 것이다. 일반인에게는 이 문무왕릉이 <삼국사기>에 기록으로만 전하다가 1967년에야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등에 <삼국사기>를 인용한 기록이 있고, 경주 부윤으로 부임한 홍양호(洪良浩, 1724~1802)가 이곳을 찾아 감회를 적은 글도 있는 것으로 볼 때 문무왕릉의 실재는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근대에 들어와 역사현장으로서 문무왕을 주목한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사학자 고유섭(高裕燮, 1905~1944)이었다. 일제강점기에 개성박물관장을 지냈던 그는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 등의 절창으로써 이곳이 문무왕의 수중릉이요 신라의 성지임을 천명했다. 그 뒤 제자 황수영(전 동국대 총장) 박사가 스승의 유지를 평소 가슴에 새기다 1967년 대왕암에 ‘상륙’하여 처음 조사를 실시함으로써 바로 전설 속의 문무왕 수중릉임을 확인하였다. 이 일은 당시 신문들이 문무왕릉이 ‘발견’되었다고 연일 대서특필할 정도로 커다란 화제였다. 황수영 박사는 그 뒤 스승을 기리고자 문무왕릉이 바라보이는 바닷가에 스승의 글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를 돌에 새겨 세워두었다. 올해 91세가 되시는 선생께서 15~6년 전 나를 데리고 대왕암을 찾은 뒤 이 빗돌을 매만지며 스승을 추억하면서 감회에 젖던 모습이 어제인양 눈에 선하다. 이 대왕암에 대한 실측 및 사진촬영 등의 정밀조사에 따르면 바위 중앙을 십자로 파내어서 파도가 들어오고 나가는 수로로 마련했다고 한다. 그럼으로써 아무리 큰 파도가 쳐도 바위 안쪽의 공간에는 수면이 항상 일정하게 유지되도록 한 것이다. 또 그 위에는 남북방향으로 길고 넓적한 큰 돌이 놓여 있다. 문무왕의 유골은 이 돌 밑에 마련된 어떤 장치 안에 안장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사리를 봉안한 불탑의 사리장엄 장치와 기본적으로 맥이 닿아 있으니, 문무왕릉이 바로 불교사의 중요한 현장인 이유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문무왕릉은 감은사지와 따로 떨어뜨려 놓고 생각할 수 없다. 불제자로서의 문무왕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한다.
백사장을 나와 이견정으로 향했다.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이 아버지가 그리울 때마다 찾아와서 멀리 대왕암을 바라보던 이견대(利見臺)다. 1970년, 황수영 박사를 비롯한 조사단은 예로부터 이견대 자리라고 알려진 몇 곳을 탐문한 다음 그 중 가장 가능성 높은 곳에 정자를 짓고 <이견정>이라는 편액을 달았다. 하지만 근래 선생께서는 당신이 비정한 이견대, 곧 지금의 이견정 자리를 의심하곤 했다. 1996년으로 기억된다. 선생께서 나를 불러 이렇게 말하였다. “자네, 이견대에 한번 가보게. 아무리 봐도 지금 이견정 있는 자리가 옛날 그 이견대가 있던 곳이 아닌 것 같아. 그 뒷산에 평평한 터가 있는데, 그곳이 이견대 자리일 것 같아. 자네도 가보고 확인해서 내 대신 발표해보면 좋겠어.” 촌로들의 말에 의지해 비정했던 이견대 자리가 잘못된 것 같으니, 지금이라도 바로잡는 게 좋겠다는 하교였다. 하지만 게으른 나는 그 뒤로도 몇 번인가 선생님으로부터 같은 얘기를 듣고도 실천에 옮기지 않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찾아온 것이다. 자신을 책망하며 이견대 자리로 추정되는 뒷산으로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신대현 / 논설위원.사찰문화연구원 [불교신문 2399호/ 2월6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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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 문무대왕릉 내부. 중앙에 판석모양의 돌이 얹혀져 있다. 이 안에 문무왕 유골이 안장된 시설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설명 : 울산 대왕암. 전체 모습이 흡사 용처럼 생겼다. 문무왕비가 용으로 화했다는 전설도 이 바위의 모습에 따라 생겼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