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122025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동방의 로마제국’ 백제의 신비로운 미소여!

〈7〉서산과 태안의 마애삼존불, 그리고 예산 사면석불

이글거리는 불길 속에 갇힌 채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숭례문을 전 국민이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일요일 밤. 통분에 못 이겨 밤새 통음했다. 다음날로 예정된 답사를 앞두고 체력을 비축해야 하건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 답답한 심정을 100년 전, 일본에 나라를 뺏겨 통탄했던 서러움과 빗댄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이튿날 아침 퀭한 얼굴을 한 채 기차역을 향했다. 그런데 매표창구 앞에서 갑자기 행선지를 바꾸고 싶어졌다. 처음엔 백제불교의 역사를 더듬어보려 불교 초전지인 전남 영광의 법성포를 들른 다음 불갑사를 찾으려 했지만, 문득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마애불, 그리고 태안마애불을 보고 싶었다. 갑작스런 변경이었지만 어차피 답사란 예정된 것보다는 즉흥적인 것도 있어야 맛이 아닌가.

‘동방의 로마제국’ 백제의 신비로운 미소여!

물길 통해 중국 불교문화 직수입한 7C 명작

독창적 예술세계의 고고함에 감탄사 저절로

<사진설명>서산 마애삼존불의 본존불.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우는 신비로운 미소가 독특하다.

예산 역에 내렸다. 예산 토박이에다 지금도 예산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친구 S가 마중 나와 있다. 방학을 틈타 나와 함께 답사길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S는 대학 내내 붙어 지내던 친구다. 졸업 후 동업할 계획도 세웠지만 그런 치기는 뜻하지 않던 일로 어그러졌다. 그 뒤 나는 공부의 길로 들어섰으나 순탄치 않았고, S는 교단에 투신하여 지금까지 20여 년을 잘 봉직하고 있다. 그 옛날 동업계획이 무산된 게 그에게는 축복이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하곤 한다. 상의도 없이 갑자기 바꾼 것을 미안해 하니, 차 시동을 걸면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느릿느릿 무덤덤하게 말한다.

“나야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

어디든 가면 되지 행선지 바뀐 게 무슨 대수냐는 거다. 이래서 충청도 사람들이 좋다.

서산과 태안의 마애삼존불상이 오늘 답사의 주목표지만 그 전에 예산 사면불을 빼놓을 수 없었다. 예산에서 622번 지방도로로 가니 봉산면 화전리 입구에 사면석불을 알리는 표지가 보인다. 근래 새로 만든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몇 걸음 안 올라가서 네모난 바위 네 면에 약사불(동), 아미타불(서), 석가불(남), 미륵불(북)을 각각 새긴 사면불을 마주했다. 가까이 다가가 바위를 돌면서 천천히 감상했다. 과연 걸작이다.

<사진설명>예산 사면석불 중 서쪽의 아미타여래상. 백제 후기의 미술 중 걸작품으로 꼽힌다.

옷주름이 매우 깊고 가슴아래에서 U자형으로 겹쳐 있고, 원형의 머리광배에는 불꽃무늬.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백제 특유의 양식이다. 지금은 머리 부분이 많이 훼손된 채 서향과 북향만 남아있고, 따로 끼울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손도 모두 없어졌다.

하지만 현재의 모습만으로도 백제 조각 중 단연 으뜸에 속하는 작품임을 알겠다. 옆에서 S도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예산에 살면서도 오늘 처음 와보았노라고 고백한다. 학생들에게 이 불상을 보여주고 싶다고도 한다. 하기야 입시지옥에 찌든 학생들이 가끔씩 이런 작품을 보면서 머리를 식히면 얼마나 좋겠는가.

1983년 밭을 갈다가 발견된 이 사면석불은 발견 당시 학계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예술성의 고고함 때문이었다. 백제의 문화를 자신의 뿌리라고 여기는 일본의 학자들이 더욱 관심을 가졌다. 그 무렵 대학원생이던 나는 일본에서 나오는 관련 논문을 번역해서 학과 교수와 동료들에게 보여주기 바빴다.

내가 오늘 택한 답사는 백제 문화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7세기의 불교미술인데 이 모두는 특히 바다와 관련되어 있다. 불교가 중국으로부터 백제에 전해진 것은 주로 물길을 통해서였다. 백제는 국토의 서남단에 자리하여 동남부의 신라, 북부의 고구려에 막혀 있는 꼴이었다. 당시 외교의 전부라 할 수 있는 중국과 일본과의 육로 통행은 애당초 생각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 대신 백제는 바닷길을 뚫었다. 고구려나 신라보다도 더 일찍 바다를 경험했고 그 바다를 자신의 장기로 삼았다. 백제는 특히 남중국의 불교계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중국의 불교문화가 백제에 직수입되었음은 당연하다. 성왕 때는 양에서 <열반경>이 수입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 모든 게 중국과 가장 가까운 뱃길을 두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따라서 다른 많은 문화와 마찬가지로 백제에 불교를 전래해 준 것도 바로 바다였으리라는 데 이견이 별로 없다. 서산이나 태안에 걸작의 마애삼존불이 조성된 배경 역시 이 바다를 첫 번째로 꼽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해양불교로서의 백제 불교와 문화를 가장 상징적으로 웅변하는 것이 바로 서산마애불과 태안마애불인 것이다.

<사진설명> 태안 마애삼존불.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백제 조각으로, 중국과의 교통요충지에 자리하여 중국과 백제 문물교류의 중요한 증거이기도 하다.

서산마애불 입구에 도착했다. 들어온 길로 조금 더 가면 보원사지다. 보원사지는 나가는 길에 보기로 하고 먼저 마애불로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올라 관리사무소를 지나 자그마한 문을 하나 넘으니 마애삼존불이 정면을 향하고 있다. 한겨울의 평일이어서인지 참배객이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다. 합장 후에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연꽃잎을 새긴 대좌 위에 여래입상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보살상이 배치된 구도다. 여래상은 얼굴이 둥글고 풍만한데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다. 이 미소는 백제 불상 특유의 모습으로, 넉넉하고 자비로운 인상을 보여준다. 머리에 관을 쓰고 있는 오른쪽의 보살입상은 얼굴에 본존과 같이 살이 올라 있는데, 눈과 입을 통하여 역시 만면에 미소를 풍기고 있다. 왼쪽은 반가상, 이 또한 얼굴 가득히 미소를 띤 둥글고 살찐 얼굴이다. 삼존상 모두 보통 세련된 솜씨가 아니다.

서산 마애삼존불의 존재가 일반에 알려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이었다. 인근의 주민들에게는 이곳이 고란사지라고 전해져 왔었다. 1958년 고란사지에서 우연히 금동불상이 출토되기까지 마을사람들은 이 불상이 그저 산자락에 있는 여느 흔한 불상으로만 생각했었지 백제 불교 최대의 조각품인지는 몰랐었다. 이듬해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7세기 백제시대의 작품임이 판명되었다.

최근 보호각이 철거되면서 삼존불의 모습은 더욱 정겹게 다가온다. 삼존불이 새겨진 바위는 위쪽을 의도적으로 깊게 파내서 삼존불의 머리 위는 마치 우산처럼 앞쪽이 불룩 튀어나와 있다. 바위면에 직접 와 닿는 비바람을 막기 위함이다. 천 년이 훨씬 넘게 이어져 온 비결이 바로 이것이었다. 게다가 양지면서도 주변에 산이 둘러쳐져 있어 세찬 바람을 막아주고 있는 것도 한몫 하고 있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하다. 보원사지와 삽교 석조보살상을 보느라 꽤 지체한 것이다. 서둘러 태안으로 향했다. 태안 앞바다는 아직 기름유출의 여파로 아우성이지만 태안읍은 평온했다. 태안은 서해안 개발로 가장 많은 발전을 이룬 지역 중의 한 곳이다. 마애불이 있는 백화산으로 향하는데, 안내판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약간 헤매야 했다. 백화산은 이 지역 사람들의 주요 등산코스이기도 한데, 정상 조금 못 미쳐 작은 대지가 있고 여기에 삼존불이 새겨진 커다란 바위가 있다. 옆에 태을암이 있다. 이 마애불도 서산 마애불이 발견된 것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알려졌다.

부채꼴 바위 면 중앙에 보살상을 두고 좌우에 불상을 배치한, 2위의 불입상과 1위의 보살입상이 한 조를 이루는 특이한 삼존불 형식이다. 서산 마애불과 마찬가지로 중국과의 교통 요충지에 자리함으로써 중국 불상과의 영향 관계 파악에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바위 바로 옆으로는 산 정상으로 향하는 도로가 바짝 붙어 있다. 1959년에 생긴 이 도로로 인해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의 일부가 균열이 가고 조각면도 다소 손상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지금도 별로 좋은 상태는 아닌 것 같다. 도로가 계곡을 가로 지르고 있는 탓에 도로를 받치고 있는 옹벽에 맺힌 습기가 마애불에까지 흘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삼존불 옆으로 1m도 안 되는 부분은 벌써 시커멓게 썩어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 같다. 임시로 습기를 제거해서 될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오늘 내가 찾은 유적들은 7세기 백제 불교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걸작들이다. 서산과 태안의 마애삼존불이 7세기 백제불교의 상징이라면 예산 사면불은 7세기 백제 불교미술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 할 만하다. 이만한 작품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시기는 7세기밖에 없다. 어느 역사학자는 백제를 ‘동방의 로마제국’으로 표현했는데, 만약 그렇다면 그건 바로 7세기의 백제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싶다. 마애불 앞에서 내려다보니 멀찌감치 태안반도가 바라다 보인다. 거기에 찬란했던 백제의 문화가 겹쳐 보이고 있었다.

신대현 / 논설위원.사찰문화연구원

[불교신문 2404호/ 2월27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