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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놀이 시만 100수 넘는 상전벽해 도량

서울 봉은사

수도 서울에서도 강남구는 가장 번화하고 화려한 부자 동네로 꼽힌다. 그 강남 중에서도 요지에 속하는 삼성동 한복판에 봉은사가 유유자적 자리하고 있다. 봉은사 앞의 큰길 이름도 ‘봉은사로’이니 대접도 꽤 잘 받고 있는 것 같다. 바로 코앞은 코엑스나 아셈 같은 마천루급 고층건물들이 즐비하고, 봉은사 담장을 맞닿아서 식당이나 카페 등이 에워쌌다. 도심 속 사찰의 숙명이 본래 그렇긴 하여도 좀 심하다싶을 정도인데, 하지만 막상 봉은사의 정문인 진여문을 들어서는 순간 도시의 때는 간데없이 사라져 있음을 느낀다. 인구밀도 최고에 소음도 역시 최고인 번잡하기 짝이 없는 대도시에 있으면서 이렇게 산사다운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는 봉은사가 대견하고 고맙기까지 하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봉은사에 가려면 마포나루나 뚝섬나루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했다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황당해한다. 강남의 중심 복판에 있는 봉은사엘 배 타고 들어갔다니!

사실 봉은사에서 한강 물길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직선거리로 몇 킬로미터만 가면 한강이다. 그래서 조선시대만 해도 봉은사는 유학자들이 뱃놀이를 즐기는 환상의 코스였다. 주로 지금의 강남구 압구정을 출발해 용산구 한강로에 있던 호수인 동호, 성동구 금호와 저자도 등지를 거치는 게 봉은사 뱃놀이의 주요 행선지였던 것 같다.

60년대 까지 마포나 뚝섬서 배타고 도착

조선시대는 승과 주관했던 ‘선종수사찰’

한양의 내로라하는 양반들치고 한 번쯤 봉은사 뱃놀이 코스를 즐기지 않은 사람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 그들이 남긴 봉은사 뱃놀이 시(詩)는 어림잡아도 100수가 훨씬 넘기 때문이다. 봉은사 뱃놀이 유람객 중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명사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조선 초의 저명한 학자 정인지와 영의정 한명회를 비롯해서 조선 유학의 거두 퇴계 이황, 조선의 최고 문장가들인 이자, 최경창, 백광훈 등 그야말로 기라성 같은 조선의 명사 준걸들이 봉은사를 즐겼다. 백곡처능, 연담유일, 설암추붕 등 당대의 고승들 역시 봉은사 상춘객 명단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사진> 봉은사 내경. 봉은사는 도심속에 자리하여 마천루에 둘러쌓여 있지만 천년고찰의 고즈넉함이 간직되어 있다.

세상은 많이 변했다. 한강을 뒤뚱뒤뚱 오가던 나뭇잎처럼 작은 거룻배는 집채만 한 호화로운 유람선 스타일로 바뀌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봉은사 신도들을 나르던 나룻배가 묶여있던 뚝섬에는 수상스키장이 성업 중이다. 한강에 걸친 다리만도 철교 포함해 30개에 육박한다. 세월의 흐름 속에 유수처럼 변해버리는 서울의 풍물 중에서 그래도 더디게 움직이는 게 있다면 바로 천 년 전부터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봉은사일 것이다. 그러니 사실 봉은사 주변이 화려하고 번잡하다고 불평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부박하게 변한 건 봉은사가 아니라 그 주변이었으니까.

봉은사의 역사를 말할 때 가장 미묘하면서도 확신하기 어려운 게 창건 부분이다. 봉은사에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들어 794년에 연회국사가 창건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부 불교사학자들은 <삼국사기> 등에 보이는 봉은사는 경주에 있던 절이고, 지금의 봉은사는 15세기부터 그 확실한 역사를 더듬어 볼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바로 봉은사에서 열렸던 승과(스님들의 과거시험)에 합격하면서 나라의 중추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지금 봉은사 건너편 코엑스건물이 들어선 곳 일부는 봉은사에서 주관한 승과가 있던 자리여서 ‘승과평’이라 불렀고, 그 표지석도 있다. 이 무렵 봉은사는 나라에 의해 선종수사찰, 곧 ‘선종의 으뜸 사찰’로 지정될 정도로 위상이 높았다. 봉은사 모든 역사에 있어서 가장 자랑스러운 부분일 것이다.

이렇게 봉은사는 학계에서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는 창건부분을 잠시 젖혀놓고 보더라도 우리나라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 하지만 지금 나의 관심은 1960년대 이후의 봉은사로, 한국 현대불교사 중에서도 바로 이 부분을 예의주시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특히 기억해야 할 부분은 1964년 봉은사에 결성된 대학생수도원의 수행상이다.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현 대불련) 구도부(求道部)는 새로운 불교운동을 펼치기 위해 봉은사에 대학생수도원을 두고 여기서 용맹정진하였다. 지금의 판전 옆 명성암이 그때 그들의 수행처이자 보금자리였다. 이들의 수행을 치기어린 젊은이들의 일시적 발심 정도로 치부한다면 그건 오판이다. 이들은 학업과 수련을 하나의 수행과정으로 일치시키고자 매일같이 배를 타고 학교와 봉은사를 오가며 10년 넘게 정진하였으니 이만한 근기와 열정도 보기 드물 것이다. 조실 청담스님, 지도법사 광덕.법정.법안스님, 지도교수 박성배.서경수.이기영 교수 등의 면모만 보더라도 이 봉은사 대학생수도원의 구성과 운영과 목적이 결코 녹록치 않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이들 봉은사 대학생수도원 식구(이들은 스스로를 가리킬 때 ‘봉은사 식구들’이라고 부른다. 내게는 그 말이 더욱 정겹게 느껴진다)들은 나중에 출가한 스님도 있고, 대부분 정계.관계.언론계.학계 등 지금 사회 각계각층에서 나름대로의 역할들을 충실히 해나가며 불교계 발전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대학생수도원은 1970년대 중반에 해체되었지만 이들은 여전히 끈끈한 정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 봉은사 대학생수도원생들과 자운스님. 자운스님은 대학생수도원 지원에 헌신적이었다.

대학생수도원출신은 대략 50명 정도인데, 지금 지면에 실명을 열거하며 밝히기는 뭣하지만 사실 나는 그 멤버들의 활동을 비교적 소상히 잘 지켜보고 있는 편이다. 작지만 큰일들을 이루어나가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언젠가 20세기가 까마득한 역사의 저편으로 흘러가 있을 때쯤이면 한국불교의 중흥의 장이자 수도의 요람처로서 봉은사와 봉은사 수도원이 기록될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재작년에서 작년에 걸쳐 미국 뉴욕주립대에 방문학자로 있었다. 그 때 그곳 동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박성배 교수와 많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졌다. 말했다시피 박 교수는 봉은사 수도원의 지도교수였다.

봉은사 수도원 식구들로부터 그에 대한 얘기는 익히 들었었지만 직접 만나보기는 거기에서가 처음이었다. 70대 중반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활력이 넘쳐 심신의 건강이 40대 후반인 내가 스스로 초라하게 느낄 정도였다. 처음 난 그 당시의 얘기를 많이 들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학교나 롱아일랜드의 자택에서 나눈 대화중에 봉은사 얘기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도미한 지 40년이 넘었으니 이제 관심도 시들어진 것인가 생각되기도 했다. 하지만 대화를 나눌수록 1960년대 봉은사 식구들하고 함께 한 수행의 나날들, 그들과 함께 김룡사에서 성철스님의 설법을 듣기 위해 3000배를 했던 일이며 도선사 등지로 함께 떠난 구도행각의 이야기 등이 쉼 없이 쏟아져 나왔다. 나중엔 대화의 대부분이 봉은사와 봉은사 식구들 이야기로 채워지기도 했다. 그 분에게도 역시 봉은사 시절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었던 것이다. 내가 미국을 떠날 때 나눈 마지막 인사도 “돌아가거든 봉은사 식구 모두들에게 꼭 안부전해 주세요.”였다.

최근 출판된 박성배 교수의 에세이집 <재미 불교학 교수의 고뇌>(혜안)에는 1960년대 봉은사 수도원에 대한 이야기가 농도 깊게 차지하고 있다. 어찌 보면 그로 인해 이루어지는 한국불교의 미국 전파는 오래 전 봉은사에서 싹이 틔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봉은사에 관해서 하나 더 말할 게 있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봉은사의 위용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했거니와, 일제강점기에 와서도 봉은사는 전국의 31본산의 하나가 될 정도로 사격이 높았다. 그 당시인 1940년대에 저명한 불교사학자 안진호(安震湖, 1885~1965)는 봉은사의 역사를 담은 <봉은본말사지>라는 글을 썼다. 봉은사의 역사를 집대성한 것은 물론이요, 관련된 시문과 인물, 봉은사에 소속된 경기 지방의 말사들까지도 모두 수록한 방대한 저술이었다.

하지만 이 글은 현재 육필의 초고상태로만 남아 있을 뿐 아직 출판되지 못하고 있다. 사찰의 역사를 담은 사지의 중요성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옛날 선종수사찰이자 지금은 대중과의 친화, 활발한 도심포교, 대중과의 긴밀한 호흡 등 모든 면에서 앞서가고 있는 봉은사가 이 중요한 사료를 왜 아직 활자화하지 않고 있는 지 그것이 내게는 불가사의하다.

신대현 / 논설위원.사찰문화연구원 연구위원

[불교신문 2414호/ 4월2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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