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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위해 명복을 빌다

화성 용주사

흔히 효(孝)는 유교의 전유물로 안다. 효란 덕이나 충, 그리고 의리 등과 마찬가지로 유교에서 발전시킨 고유한 가치로 생각하지, 효야말로 불교에서 아주 강조되었던 덕목 중 하나였음을 아는 사람은 꽤 드문 것 같다. 부모의 은혜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다는 것을 깨우친 <부모은중경>이라는 불경이 있고, 일연 스님이 지은 <삼국유사>에도 불교 효행의 사례를 모은 <효선>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 불교사에서, 특히 유학이 사회의 이념으로 굳게 자리 잡았던 조선시대에서 효로써 불교의 가치를 드날렸던 역사의 현장을 한 번쯤 찾아가보지 않을 수는 없는 일. 바야흐로 봄이 무르익어가는 3월의 셋째 주, 경기도 화성의 용주사(龍珠寺)를 찾았다.

비극적으로 죽은 사도세자 위해

아들 정조가 절 중창 명복을 빌다

보경스님의 ‘부모은중경’설법 듣고 감동

배봉산 묘 옮겨와 능 수호사찰로 중창

<사진> 용주사 대웅보전. 용주사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애틋한 효심이 깃든 사찰이다.

그에 앞서 불교신문사의 A기자, H기자와 함께 수원을 들렀다 가기로 했다. 얼마 전 이 지역의 향토사연구자 한 분에게서 수원 이목동의 비석거리에 있는 선정비 2기의 비좌가 사찰 비석의 그것을 갖다 쓴 것 같다는 제보가 신문사에 들어와 있었던 것. 신문사에서는 그때 곧바로 나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그 동안 미뤄왔다가 이번 용주사행을 기회삼아 이제야 가보기로 한 것이다.

이목동 비석거리엔 수원 지역에서 옮겨 온 조선시대 비석들이 길 한쪽에 그득히 줄지어 서있었다. 가서 보니 대부분 고을 원님네들의 선정비다. 그 중에서도 비석을 받치는 비좌가 거북 형태로 되어 있는 2기가 단연 눈에 들어왔는데, 바로 문제의 그 비석들이다. 거북 모양의 비좌를 특별히 귀부(龜趺)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이래로 고승들을 기념하는 비석의 대좌는 대부분 귀부를 쓰기 마련이었다.

또 고승의 비석이 아니더라도 사찰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사적비에도 귀부가 놓였다. 다시 말하면 귀부는 불교 관련 비석의 전용 대좌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런 상식을 갖고 봐도 선정비에 귀부가 쓰인 게 이상한데, 게다가 비석의 크기와 귀부와의 비례가 전혀 맞지 않고, 또 서로 석질도 다르다. 비석과 귀부가 서로 제짝이 아닌 게 한눈에 확인되었다. 아마도 비석을 세울 때 사찰에 있던 귀부를 가져다가 억지로 끼워 맞춰 넣은 모양이다. 다만 제보자의 의견처럼 이 귀부들이 신라 말 고려 초에 용주사에 머물렀던 염거, 혜거 두 스님의 비석과 관련 있는 지는 좀 더 연구해 봐야 할 것 같다. 귀부의 양식이 그보다는 후대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불교 비석의 귀부에 선정비의 그것을 얹어놓은 게 정상일 리는 없다. 작은 일 같지만 눈여겨보고 알려준 제보자의 정성이 고맙게 느껴지는 한편, 이를 방치한 관련기관의 무신경에 슬며시 화도 났다. 선정비란 수령의 치적을 기념하여 세운 것으로 대개 수령이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지역민들이 자발적으로 세우는 게 통례였다. 이 비석의 주인공들 역시 역사적으로 훌륭한 인물들이건만 이리 해놓으면 결국 그들의 명성에 흠이 된다는 것을 왜 모르는 걸까.

대충 이런 소견을 기자에게 말해주고는 용주사로 향했다. 용주사 초입에 들어서니 주변이 굉장히 어지럽게 느껴진다. 사도세자와 정조의 능인 융건릉과 용주사 주위에 아파트가 건설될 예정이라 택지조성 공사가 한창인 탓에 주변 도로며 마을 입구가 이리저리 파헤쳐졌기 때문이다. 고층아파트로 상징되는 도시화를 여기라고 막을 수야 없다손 치더라도 하필 우리나라 효의 대표적 현장인 용주사의 고즈넉함과 정갈함을 해치면서까지 이렇게 가까이 들어서야 하는지, 못내 아쉽기만 하다.

용주사가 효심의 사찰로 불리는 연유는 이렇다. 일찍이 신라시대인 854년에 갈양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가 조선시대 후기 병자호란 때 불타 없어진 이 절이 다시 중창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정조 임금의 효심에 힘입었기 때문이다. 잘 알다시피 정조의 아버지는 복잡다단한 정치역학 속에서 부왕인 영조의 미움을 받아 억울하게 죽어갔던 비운의 사도세자. 정조는 어린나이에 그 비운의 현장을 목도하였고, 왕이 되어서 더욱 더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사무치게 그리워했다.

<사진> 용주사 후불탱화. 정조의 명으로 단원 김홍도가 그렸다고 전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정조는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 설법을 듣고는 크게 감동하였다. 그리고는 거센 반대를 무릅쓰면서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양주 배봉산에 있던 묘를 옮겨와 현릉원(뒤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하고, 그 능을 수호할 사찰로 용주사를 커다랗게 중창하였다. 정조는 수시로 능을 찾고 용주사를 찾아 아버지의 극락왕생을 기원했다. 역사상 한 나라의 군주로서 이만한 효행을 보인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없지 않을까.

용주사가 낙성된 날, 정조는 용 한 마리가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정조는 절 이름을 용주사라 지었고, 이 뒤로 용주사는 불심과 효심이 한데 어우러진 곳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우리나라의 전래 동화나 전설 중에는 효에 관한 일화가 으뜸을 차지한다. 그런즉 어찌 정조의 효 하나만을 최고인양 추켜세울 수 있을까마는, 그 효의 뒤안길에 불교와 용주사가 자리하고 있는 것은 분명 간과할 일은 아닐 것이다.

정조는 영조와 더불어 18세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영명한 군주였다. 근래에 정조의 개혁정치를 주제로 한 역사서가 붐을 이루며 출간되었고, 모 TV방송국에서는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가 목하 커다란 인기를 끌며 방영되고 있다. 그만큼 정조는 현대인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끄는 존재다. 나는 그러한 배경에는 그가 이룬 탁월한 정치적 업적도 물론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의 효심이 더 큰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효심은 바로 용주사와의 인연으로 더욱 빛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용주사는 불교에서 효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지금 용주사에는 효행교육원과 효행박물관이 있고, 또 효성전과 부모은중경탑이 있으니 하나의 절로써 이만하게 효성을 강조한 사찰이 어디 있겠는가. 대웅전 후불탱화나 병풍을 당대 최고의 화가 단원 김홍도로 하여금 장식케 한 것도 정조가 얼마나 용주사를 아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나와 H기자, 그리고 수원에서 오늘 합류한 또 다른 신입 H기자 등 우리 일행 세 사람은 용주사 탐방을 마치고 나와 바로 길 건너편에 자리한 아파트 공사장의 현장사무소를 찾아갔다. 얼마 전 공사 도중에 사도세자의 재실 주변에서 정조와 관련된 새로운 건물터를 발견했다는 소식을 들어서다. 역사에는 사도세자의 능을 자주 찾아뵙고 싶었지만 왕의 몸으로 그럴 수가 없었던 정조가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셔놓은 재실 앞에 자신의 초상화를 걸어놓게 했다고 나온다. 그림 속의 자신으로나마 아버지의 능을 매일같이 뵈려 한 것이다. 만약 새로 발견된 건물터가 바로 그러한 역사를 뒷받침하는 건물터라면 새로운 중요한 자료를 하나 더 얻게 되는 셈이다.

<사진> 용주사 전경. 울창한 소나무 아래로 놓인 계행을 새겨놓은 입석들이 마치 왕 앞에 좌우로 도열한 문무백관과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우리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공사 관계자들 찾았다. 그러나 그들의 태도는 고압적이고 비협조적이어서 우리의 질문에 모르쇠로만 일관하였다. 내 두 배만한 체구의 H기자가 우리의 대표로 나섰건만 그 역시 맥없이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건물터 확인은 아쉽게 실패했어도 어쨌든 이것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다시 한 번 느낄 수는 있었다.

석가부처님은 제자들과 더불어 길을 가다가 길가에 널브러진 뼈를 보고 갑자기 엎드려 절하였다. 깜짝 놀란 제자들이 연유를 묻자, “저 한 무더기의 마른 뼈들이 혹시 내 전생의 할아버지이거나 부모님일지도 모르기에 절하였노라.”…(중략) 감동한 제자들이 어떻게 하면 부모님의 은혜를 갚을 수 있는지 여쭈자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왼쪽 어깨에 아버지를 업고, 오른쪽 어깨에 어머니를 업고서 수미산을 백 천 번을 돌고 돌아 살이 닳아 뼈와 골수가 드러나더라도 부모님의 깊은 은혜는 다 갚았다고 할 수가 없다.”

<부모은중경>에 나오는 이야기다.

신대현 / 논설위원ㆍ사찰문화연구원

[불교신문 2416호/ 4월9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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