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후기 비운의 왕위쟁탈전 흔적 남아대구 동화사 비로암 |
한식을 하루 앞둔 4월4일 금요일 오전, 평소와 다르게 북적거리는 동대구역에 내렸다. 식목일인 데다가 주말, 그리고 한식까지 겹쳐서인지 평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느라 큼지막한 동대구역이 전에 없이 비좁아 보인다. 10년 전쯤, 대구 H대학의 겸임교수로 있으면서 5년 넘게 서울에서 기차로 출퇴근한 적이 있었다. 얼마나 자주 동대구역을 이용했는지 나중에는 개표 역무원들과 서로 수인사를 나눌 정도였다. 그때는 대구라는 유서 깊은 도시에 걸맞지 않게 기차 역사가 작은 편이었지만 지금은 KTX 덕에 아주 크고 멋진 플랫폼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요즘의 기차 역사는 대부분 규모가 커지고 시설도 번듯해지기는 했지만, 반면에 서로서로 손을 흔들며 반갑게 만나고 아쉽게 헤어지던 인간미 넘치는 옛날 분위기는 거의 나지 않는다. 저기 저쯤이 학교에서부터 따라와 올라가는 내게 학생들이 손 흔들어 주던 곳이지 하며 10년 전을 떠올리려 해도 잘 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디지털화한 시대에 살면서 케케묵은 아날로그 감성을 아직도 나는 버리지 못한 것일까. 경문왕이 선대 민애왕 위해 삼층석탑 세워
사리장치에 추모의 마음 245자에 새겨 넣어 <사진>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9세기에 민애대왕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역에서 나와 10분 남짓 걸어가 파티마병원 앞 버스정류장에서 1번 버스를 타니 1시간도 채 안 되서 동구 도학동, 동화사 입구에 내려준다. 팔공산 자락 곳곳마다 나뭇가지에는 어느새 한창 물아 올라있어 꽃망울을 터뜨리려 하고 있고, 개나리며 진달래가 활짝 피어 있다. 드문드문 모여 있는 벚꽃나무들도 만개했다. 오늘 동화사를 찾은 것은 동화사 역사 속에 깃든 통일신라시대 왕권쟁탈 암투의 비극과 용서를 살펴보기 위함이다. 한 사찰에 왕권쟁탈과 관련된 일화가 스며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동화사는 493년에 극달 스님이 창건했으니 15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지금과 같은 영남 지역을 대표하는 거찰로 자리 잡은 건 9세기 이후에 들어서부터다. 그것은 각종 기록과 더불어 지금 남아 있는 여러 가지 유물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오늘날에는 조계종 본사의 하나로서 드넓은 경내 여기저기에 20여 동이나 되는 많은 전각이 들어서 있고, 국보며 보물이며 그야말로 숱한 문화재가 전하고 있는 동화사이건만 오늘 나는 다른 곳은 다 놔두고 오로지 산내암자인 비로암 주위만을 맴돌고 있다. 바로 이곳에 신라 후기 비운의 왕권쟁탈전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남쪽 주차장에서 올라오면 동화사 대웅전 경내로 들어서기 바로 앞 오른쪽 나지막한 대지 위에 자리 잡은 곳이 비로암이다. 지금은 법당과 산신각, 그리고 요사로만 이루어진 작은 규모로 동화사를 관광객으로 온 사람들은 그냥 지나쳐버리기 십상인 조용한 곳이다. 바로 이곳에 신라 왕국의 존망을 위태롭게 할 정도로 왕권쟁탈의 거친 풍운이 휘몰아쳤던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삼층석탑의 유래를 아는 사람들은 더더욱 드물다. <사진설명>비로암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민애대왕사리호. 비운에 간 민애대왕을 추모하기 위한 글이 새겨져 있다. 사실 핵심은 탑보다는 여기에 봉안된 사리장엄이다. 탑은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드는 것인데, 사리를 담아두는 용기나 장식품을 사리장엄이라 부른다. 1967년 비로암 삼층석탑을 수리할 때 발견된 사리를 담았던 항아리(동국대학교 박물관) 겉면에는 비극적 생을 살다간 민애왕(閔哀王)을 추모하기 위해 863년에 경문왕(景文王)이 이 삼층석탑을 세웠다는 내용을 담은 245자가 새겨져 있다. 여기까지는 이해하는데 별 문제가 없다. 그런데 실상 돌아간 왕을 위해 현세의 왕이 특별히 사리탑을 만들어 준적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렇다면 민애왕은 어떤 인물이기에 경문왕이 특별히 그를 추모해야만 했던 것일까? 또 민애왕과 동화사는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러한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우선 9세기 중반에 일어났던 일대 정변(政變)의 경과를 알아야 한다. 838년과 839년의 단 두 해 동안 왕 2명이 죽고 3명의 왕이 잇달아 즉위하는 초유의 정변이 일어났다. 이 골육상쟁의 무대에 주연으로 등장하는 사람은 제43대 희강왕과 제44대 민애왕, 제45대 신무왕 등 세 명의 왕, 그리고 그 밖에 장보고와 김유징 등 당대 최고의 권력자들이 조연으로 나선다. 사리호의 주인공이 민애왕이므로, 민애왕을 중심으로 얘기를 풀어본다. 사실 민애왕은 본래 왕자는 아니었고, 신라 최고위 관직인 시중(侍中)인 김명(金明)이다. 그가 왕위에 오르게 된 발단은 제42대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은 것에서 비롯된다. 왕위 계승자로는 서열 상 흥덕왕의 사촌 동생 김균정(金均貞, ?~836)과 오촌 조카 김제륭(金悌隆)이 우선후보였는데 이 두 사람은 양보하지 않고 서로 대립하였다. 그런데 민애왕 김명은 김제륭과 오래전부터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고 있었으므로 김제륭을 왕으로 적극 추천하였다. 숙질 간인 김균정과 김제륭 두 세력은 궁궐 안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김균정이 전사하고 그의 아들 김우징과 김양은 부상당한 채 도망갔다. 김우징은 중앙 권력과는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해상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청해진의 장보고(張保皐, ?~846)의 진영으로 피신하여 뒷일을 도모하였다. 왕권경쟁에서 일단 승리한 김제륭은 곧바로 즉위하여 제43대 희강왕(僖康王, 836~838)이 되었다. 민애왕 김명은 최고의 공신으로 대우받았지만 야심에 넘쳤던 그는 거기에 만족 않고 2년 뒤 쿠데타를 일으켰고, 희강왕은 그들을 제압할 힘이 없음을 깨닫자 자결하였다. 이에 김명은 약관을 조금 넘긴 스물두 살의 나이에 제44대 민애왕으로 즉위했다. 한편 청해진 장보고의 그늘 아래 숨어 지내던 김우징은 장보고에게서 군사 5000명을 빌어 반군을 결성했다. 그의 군대는 838년 12월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전투에서 관군에 대승하여 승기를 잡았다. 김우징은 여세를 몰아 경주로 진격하였고, 이듬해 1월 대구에서 양측의 사활을 건 일대 결전이 벌어졌다. <사진> 대구 동화사 대웅전 앞 봉서루. 미리 말하거니와, ‘민애대왕 사리호’로 불리는 이 사리장엄을 봉안한 석탑이 대구 동화사 비로암에 세워진 것도 바로 대구에서의 치열한 전투 때문이었다. 이번 전투는 김우징의 대승으로 막을 내렸다. 패배한 민애왕은 민가에 숨었으나 결국 발각되어 23세의 젊은 나이로 생애를 마감했다. 승리한 김우징은 제45대 신무왕(神武王, 재위 839)으로 즉위했다. 3년 전 왕위에 오르려다 민애왕 김명에 의해 패해 죽은 선친 김균정의 원한도 풀고 자신도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신라의 대표적인 두 가문끼리의 상쟁은 정치적으로 커다란 후유증을 남겼다. 이대로 가다가는 사회가 크게 분열될 판이었을 것이다. 그러자 신무왕의 후손 제48대 경문왕은 오랜 갈등을 해소하고자 가문의 원수였던 민애왕을 위해 정변이 일어난 지 24년째 된 863년에 동화사 비로암에 탑을 세우고, 거기에 민애왕을 추모하는 글을 새긴 사리항아리를 봉안토록 하였다. 더 이상 서로 죽이고 죽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결연한 선언이기도 했을 것이다.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은 바로 이처럼 복잡한 정쟁 속에 죽어간 왕들을 추모하기 위한 목적에서 세워졌다. 비로암 삼층석탑 앞에서 바라보면 팔공산의 연봉들이 끝 간 데 없이 멀리 이어지고 있는 게 보인다. 그 옛날 권력욕에 이끌려 골육상쟁을 벌이다 참회하며 여기에 이 탑을 세웠던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저 팔공산을 바라다보았을까? 천 년도 넘은 옛날이야기라고는 해도 권력을 향한 인간의 속성이 과연 크게 달라진 게 있을까 싶다. 이 탑이 세워진 뒤 실제로 당시 모든 갈등과 원한이 다 풀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는 정치일 뿐, 단순히 제스처로만 끝나고 깊숙이 자리 잡은 정적 간의 갈등은 여전히 남아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자비와 용서를 최고의 가치로 친다. 왕권쟁탈의 욕심은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불러왔지만 결국 그 핏자국을 씻어낸 건 불교의 자비심이었다. 우리나라 불교역사상 이만한 헛된 욕망과 참회의 장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그러한 역사적 현장이 바로 동화사였다는 점은 기억해 둘 만한 일이 아닐까. 신대현 / 논설위원ㆍ사찰문화연구원 [불교신문 2418호/ 4월16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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