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호자 스님, 신라에 정법당간을 세우다〈14〉구미 도리사 |
친구 중에 H는 유독 재주가 뛰어났고, 공부도 발군이었다. 행실도 그만하면 좋았으니 그야말로 넘버원 친구였다. 다만 마음이 유달리 약하다는 점이 단점이라 우리는 그에게 ‘유리 가슴’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H는 사랑에 무척 서툴렀다. 대학 때 장래를 약속했던 여자친구는 제대하고 나니 이미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었고, 어렵사리 새로 사귄 애인은 부잣집 딸이었는데 시쳇말로 가진 거라고는 두 주먹밖에 없던 터라 장인 될 사람의 허락을 얻지 못했다. 그녀는 그를 버렸고, 그도 상심 끝에 미국으로 떠났다. 신파극 같은 사랑이었다. 뭘 물어도 입가에 애매모호한 웃음만 흘리던 그가 한 번은 얼큰히 취하자 명색이 죽마고우인 내게 수줍은 듯 고백했다. 고구려에서 내려와 공주의 병 고치고 창건 부도탑 사리기 좌선대 현재까지 남아 있어 “도리사 올라가기 전에 철쭉이 잘 피어있거든. 나는 그 철쭉만 보면 마음이 편해져. 그 중에도 보라색 철쭉이 가장 좋아.”도리사와 선연하게 빛나는 보라색 철쭉이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들은 것 같다. 그러나 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도리사의 복사꽃만 떠올리느라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렇게 10년이 흘러갔다. 오랜만에 미국에서 H가 전화를 걸어왔다. 내가 이 코너를 연재하는 걸 알고 있는 그는 말끝에 도리사에는 안 가느냐고 물어왔다. 미안하다는 듯한 말투로, 가거들랑 철쭉 꽃 좀 찍어서 보내달라고 하면서. <사진> 구미 도리사 극락전. 조선시대의 건물이다. 창건 당시의 도리사는 지금의 주차장 부근이었다고 한다. 봄이 무르익는 4월 초순. 경북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 도리사를 찾았다. 기차를 타고 구미역에 내려 해평으로 가는 버스를 타니 일주문 앞에서 내려준다. 여기서부터 경내까지는 꽤 멀어 아무리 잘 봐주어도 40분 이상은 걸어야 할 것 같다. 아직은 춘삼월 호시절이니 그래도 걸어갈 만했다. 멀리서 바라보니 도리사를 감싸 안은 태조산의 자태가 꽤 웅장하다. 태조산은 <삼국유사>에는 냉산(冷山)이라고 나온다. 산자락 주변에 늘 선선한 기운이 감돌아서 이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다른 곳에 비해 기온이 낮은 것은 이곳이 강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탓도 있다. 낙동강이 생각보다 가까워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서쪽으로 널따란 해평(海坪, 바다같이 너른 들)이 보이고 그 너머로 유유하게 흐르는 낙동강이 시야에 들어온다. 사실 우리나라 불교의 전파에는 물길이 큰 역할을 했다.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스님도 이 물길 따라 이곳까지 내려왔을 가능성도 높다. 남한강(전등사, 신륵사)을 타고 충청도 금강(중원 탑평리 사지, 미륵사지, 법주사)을 지나 낙동강으로 내려오는 코스는 곧 초기 불교전파의 루트이기도 하다. 경부운하가 과연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누군가 나서서 물길에 따른 사찰 입지를 연구하면 좋은 성과가 나올 것 같다. ![]() ①도리사 사리기. 석종형 부도에서 발견된 것으로,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전각형 사리기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산 도리사’라고 했지만 지금은 ‘구미 도리사’라고 해야 한다. 1995년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선산군(善山郡)이 구미시에 통합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행정규모가 훨씬 큰 구미에 얹혀 있지만 이 지역 사람들은 아직 선산이라는 이름에 애착이 많다.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연조 깊은 선산이라는 지명이 이렇게 맥없이 사라지는 게 작금의 도시화지만, 지명도 문화인데, 우리나라에서 문화는 늘 개발에 눌리기 일쑤다. 도리사에는 신라 최초의 사찰이라는 관사(冠詞)가 따라붙곤 한다. 그래서 ‘해동 최초가람’, ‘신라불교 초전법륜지’ 라는 말이 도리사를 수식한다. 도리사 창건에는 묵호자(墨胡子) 또는 아도(阿度)스님과 모례(毛禮)와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스며있다.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것은 527년 법흥왕 때 일인데, 기실 그 훨씬 이전에 이미 불교는 전파되어 있었다. 고구려와의 접경지인 이곳에 400년대 중반 무렵 불교 전파를 위해 고구려에서 묵호자가 내려왔다. 당시 신라는 눌지왕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불교를 대놓고 포교하는 게 금지되어 있어서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는 우선 선산에 있는 모례라는 사람의 집에 은거하면서 기회를 엿봤다. 그러던 차에 중국 양(梁)나라에서 신라에 향(香)을 보내왔는데, 조정에서는 이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묵호자는 이에 조정에 찾아가서 향의 용도와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마침 신라 공주가 병을 앓았다. 백약이 무효했건만. 묵호자는 자신이 고치겠다고 나서서 향을 피우고 염불을 외워 병을 고쳐주었다. 감격한 눌지왕은 그의 소원대로 불법을 펼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하지만 눌지왕이 죽자, 대신들은 묵호자를 핍박했다. 묵호자는 도망하다시피 나와 모례의 집 굴 속에 숨은 후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이상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삼국유사>에도 이와 거의 같은 내용이 소개되어 있는데, 다만 주인공이 묵호자가 아니라 아도로 되어 있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묵호자와 아도가 동일인이 아닐까 하는 강한 심증을 갖고 있다. ![]() ②도리사 석탑. 고려시대 탑이라고도 하지만, 4~5세기 중국에서 이런 형태의 부도탑이 유행했던 점으로 볼 때 아도 스님의 사리탑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험한 환경 하에서 불교를 알리기 위해 핍박을 무릅쓰고 내려온 아도(또는 묵호자)나, 그의 후견인이자 불자로서 죽음을 두려워 않고 아도를 숨겨준 모례는 신라 불교의 최대 은인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도가 은거했던 모례네 집이야말로 한국불교사상 손꼽는 성지라고 할 수 있다. 도리사가 창건된 것도 바로 이때였다. 공주의 병을 고쳐주고 왕궁에서 돌아와 모례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도는 부근에서 겨울철임에도 불구하고 복숭아꽃.배꽃이 만발한 것을 보았다. 이곳을 포교의 근거지로 삼으라는 계시라고 생각하곤 절을 짓고서 도리사(桃李寺)라고 이름 지었다. 이후 신라에서 불교가 크게 발전하고, 원효.의상 등이 나타나 한국불교의 꽃을 피웠던 점을 생각할 때 신라에 불교를 처음 싹 틔운 아도와 모례, 그리고 그 첫 꽃봉오리인 도리사의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일주문을 지나 천천히 올라가며 한가롭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 주변이 옛날 아도스님이 절을 창건했을 때 복숭아꽃과 배꽃이 피던 자리가 아니었을까 어림짐작해 가면서 올라가자니 차 타고서 휑하니 올라가는 것보다 이것저것 눈에 보이는 것도 많아서 좋다. 어느새 널찍한 주차장이 보이고, 조금 더 올라가니 입구가 나온다. 절 문턱에는 요사와 강당 등으로 쓰는 큼직한 3층짜리 시멘트 건물이 주변을 압도한다. 고색창연한 도리사의 모습을 기대하고 올라온 사람들은 의외의 모습에 놀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도리사의 진짜 경관은 그 뒤로 올라가면 나온다. 극락전이 자리한 경내가 바로 그곳이다. 왼편 산자락에는 아도스님의 흉상이 있고, 그 앞으로 극락전과 사리탑 등이 있다. ![]() ③도리사 아도화상 좌선대. 신라시대 아도 스님이 이곳에 앉아 참선했다고 전한다. 극락전 앞으로 난 길을 내려가니 그 옛날 아도스님이 수행했다는 좌선대가 있다. 기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 자리가 도리사의 기맥이 가장 왕성하게 흐르는 지점이라고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나도 한 번 앉아볼까 망설이다가, ‘에이, 나 같은 사람이 앉으면 아도스님이 화내시겠지’ 하며 돌아섰다. 극락전으로 돌아오니 바로 뒤쪽 약간 높게 마련된 자리에 석종형 사리탑이 하나 보인다. 1977년 이 탑을 수리할 때 신라시대의 사리장엄이 발견되었다. 지금은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있는 국보로 지정된 전각 형태의 육각형 신라시대 사리기가 그것이다. 발견 당시 아도스님의 행적과 관련하여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었다. 또 극락전 앞에 있는 사각형 사리탑도 눈여겨봐야 할 유물이다. 이런 유형은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드물어 학계에서는 고려시대 탑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4~5세기 중국에서 유행한 승려 부도탑과 비슷해서 아도스님의 부도탑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이처럼 도리사에는 1500년 전 아도스님과 관련된 유물과 유적이 여럿 전하고 있다. 사실 나는 아도의 포교는 미완성으로 끝난 게 아닌가 생각한다. 공주의 병을 고쳐주며 일시적으로 눌지왕의 지지를 얻기는 했어도 왕의 사후에는 다시금 기득권자들에게 심한 배척을 받으며 쓸쓸히 숨어야 했으니 말이다. H가 도리사를 자주 찾았던 것도 그런 사실(史實)을 자신의 실패한 추억에 오버랩해서 위안을 삼은 게 아닐까 순간 생각해 봤다. 내가 봐도 웃기지도 않는 췌언이긴 하지만. 그나저나 철쭉은 아직 철이 아닌지 피지 않았다. 신대현 / 논설위원ㆍ사찰문화연구원 [불교신문 2420호/ 4월23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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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사 올라가기 전에 철쭉이 잘 피어있거든. 나는 그 철쭉만 보면 마음이 편해져. 그 중에도 보라색 철쭉이 가장 좋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