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112024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15>부여 왕흥사지

4월의 세 번째 주, 남도로 향한 길목은 기대 밖으로 곳곳이 막혀 있었다. 이번 탐방은 대전에서 김제, 전주, 영광, 해남으로 가는 코스를 잡았던 것인데, 국도는 대전을 지나자마자 정체되기 시작하더니 김제로 들어가는 길목에 와서는 기다랗게 줄을 지어 서 있다. 모든 차량은 길 중간 중간에 설치된 임시 검문소에서 차렷 자세로 선 채 고무호스에서 내뿜는 세찬 물세례를 받아야만 통과되었다.

100여년 동안 중요한 왕실사찰 역할 맡아

일본 최고사찰 ‘비조사’의 모델로도 추정

<사진> 왕흥사 복원도. 삼국사기에는 왕이 배를 타고 왕흥사로 건너갔다는 기록이 보인다.

AI(조류 인플루엔자) 때문이었다. 일명 조류독감이라는 이 ‘가축 흑사병’은 남도를 큰 혼돈 속에 몰아넣고 있었다. 특히 이 병의 발원지로 알려진 김제 부근부터 호남 전역은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우주복처럼 생긴 옷을 걸친 방역요원들은 지나가는 차마다 세워 놓고 약을 뿌려대는데, 그걸 맞으려 줄지어 있다 보니 마치 영화에서 본 우주전쟁이라도 일어난 양 기분이 묘하다. 운전석에 앉은 친구는 차창에 뿌려지는 물대포에 직접 맞은 양 얼굴을 찡그린다.

아닌 게 아니라 방역검문소 몇 곳을 잇달아 지나가다보니 나중에는 마치 우리가 병원균을 옮기는 사람 같아 마음이 몹시 편치 않았다. 게다가 주변의 분위기도 보통 살풍경이 아니다. 지나는 사람들 대부분 눈만 배꼼이 내놓은 커다란 마스크를 쓰고 있고, 중간에 들른 식당이나 상점 등도 텅텅 비어 있다. 이래서야 기분상 도무지 탐방할 맛이 나질 않는다. 탐방이든 여행이든 마음이 편해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의논 끝에 답사코스를 바꾸기로 했다.

사실 부여는 이 연재를 시작하면서 진작 가보았어야 했을 곳이었다. 신라에 앞선 백제불교의 유적이 곳곳에 남아있으니 백제불교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코스라고 할 수 있다. 그렇건만 이런저런 이유로 아직도 못 갔던 것인데 AI를 핑계삼아 차를 돌려 드디어 부여로 향하였다. 첫 행선지는 왕흥사지로 정했다. 부여읍에 들어가 조금 외곽으로 나오면 진산인 부소산을 감싸 안으며 구비구비 흐르는 기다란 강이 보인다. 트로트노래 ‘백마강의 달밤’, ‘꿈꾸는 백마강’에 나오는 바로 그 백마강이다. 백마강을 가로지르는 백제대교를 건너 규암 방면으로 약 1㎞쯤 가니 너른 벌판이 나타난다. 이곳이 바로 백제 후기의 불교를 상징하는 왕흥사다.

<사진> 왕흥사지 항공사진. 부여에서 백마강을 건너 규암 방면으로 1km거리에 자리한다.

지금은 절터만 남은 왕흥사(王興寺)는 족보에 나오는 유명한 사찰이기는하지만, 실상은 아주 최근에야 그 숨겨진 가치가 알려졌다. 577년 창건되어 660년 백제 멸망과 함께 폐사가 되었으니 사찰로서 운영된 시간은 100년이 조금 넘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짧은 역사여도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근래까지 왕흥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것처럼, ‘산기슭과 물가에 접해 있고, 채색과 장식이 장엄하고 화려하다. 또한 꽃과 나무가 빼어나 춘하추동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어 왕이 매번 배를 타고 가 향불을 올리고, 아름다움을 감상하였다’는 곳 정도로만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최근 이루어진 고고미술사적 성과에 힘입어 백제 왕실, 특히 위덕왕(威德王)의 원찰이었던 점이 새롭게 밝혀졌다. 이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얼마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덕왕의 태자 때 이름은 창(昌)이었다. 할아버지는 유명한 무령왕(武寧王)이고, 아버지는 수도를 공주에서 부여로 옮기면서 쇠퇴일로를 걷던 백제를 일약 강국으로 중흥시킨 성왕(聖王)이다. 성왕의 동상은 지금 부여 도심 한복판의 로터리에 자리 잡고 있어 부여 사람이면 싫든 좋든 하루에도 몇 번씩 우러러 보아야 한다. 그만큼 성왕은 부여와 관련이 깊고, 또 후기 백제의 문물을 발전시킨 성군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그의 일생이 화려하고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말년은 비참했다. 충북 옥천의 관산성에서 벌어진 신라와의 전투 끝에 전사하였고, 태자 창은 그 장면을 무기력하게 지켜보아야만 했다. 창은 전장에서 돌아와 즉위는 하였지만 죄책감에 크게 괴로워했다. 그래서 얼마 안 있어 출가하여 수도에만 전념하겠노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신하들의 극력만류로 결심을 접어야 했다. 대신이라면 좀 뭣하지만, 어쨌든 자기 대신 100명의 출가를 허락하는 선에서 대리만족을 이루었다. 아무튼 위덕왕은 불교 홍포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국내는 물론, 외교적으로 가까운 관계였던 일본에 절을 짓는 전문가들을 보내는 등 불교와 불교문화를 전파하는데 각별히 공을 들인 것이 그 한 예다.

문헌에 나오는 위덕왕과 불교에 관련된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헌데 작년 10월 왕흥사지 발굴 도중 목탑지에서 사리장엄이 발견되어 상황이 달라졌다. 백제 사리장엄은 아주 드물기에 이것만 가지고도 얘깃거리가 충분한데, 여기다가 ‘丁酉年二月十五日 百濟王昌 爲亡王子立刹 本舍利二枚 葬時 神化爲三’이라는 29자의 글이 사리함에 음각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리장엄에 글이 새겨진 것 자체가 드문 일이고, 더군다나 그 내용이 왕과 관련된 것은 지난번 소개했던 동화사 비로암 사리장엄 정도다. 게다가 왕흥사 사리장엄은 별도로 만든 석제 사리함 안에서 사리 내함과 외함, 사리병 등으로 이루어진 사리장엄 일체가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진진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사진> 왕흥사지 목탑지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 백제미술의 아름다움이 잘 드러나 있다. 특히 사리함 겉면에 왕흥사의 창건배경과 관련된 29자의 명문이 음각되어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

명문 중 제일 앞에 나오는 정유년은 577년으로, <삼국사기>에 나오는 600년이라는 왕흥사 창건연대보다 23년이 앞선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런데 이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2월 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지었다. 본래 사리는 2매였으나 봉안할 때 신비롭게도 3매로 변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명문은 여러 가지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우선 왕이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뜬 왕자를 위해 절을 지었다는 것 자체가 새로 접하는 사실이다. 게다가 본래는 2매였던 사리가 갑자기 3매가 되었던 일화도 흥미롭다. 혹자는 ‘亡’을 ‘三’으로 보아 ‘죽은 왕자’가 아니라 ‘셋째 아들’이라고 봐야 한다지만, 어찌되었든 왕흥사가 왕실과 관련된 중요사찰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또 미술사적으로 본다면, 사리장엄을 만든 솜씨가 일견 소박해 보이지만 실은 갖은 공교를 다 부린 백제 특유의 ‘눈에 쉽게 띠지 않는 멋’을 잘 간직한 아주 훌륭한 작품이어서 이래저래 왕흥사의 사격을 높여주고 있다.

나는 백제 불교의 4대유적지로 익산 미륵사, 김제 금산사, 공주 대통사, 부여 능산리사지를 꼽고 있었는데, 여기에 왕흥사지를 새로 추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 동안 우리는 왕흥사의 가치를 거의 몰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숨겨진, 혹은 미처 몰랐던 백제불교 흥륭의 역사가 유물을 통해 비로소 알려진 것이다. 글로써 하는 문헌사도 물론 중요하지만, 유물이나 미술품으로 보는 역사도 이래서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다.

이제 왕흥사는 백제의 가장 대표적 사찰로 자리매김 해야 할 것 같다. 국내의 사학자들도 사리장엄이 출토된 것을 계기로 비상한 관심을 보이면서 왕흥사의 중요성이 새롭게 인식되는 분위기다. 한국 고대사에 유난히 관심이 많은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이달 초 왕흥사를 둘러보았던 오하시 와세다대 교수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 중 하나로 꼽히는 ‘아스카데라’, 곧 비조사(飛鳥寺)의 모델이 바로 왕흥사일 것이라는 얘기를 했다.

그의, “같은 계통의 기술자가 두 절을 모두 지은 것으로 보이며, 백제는 불상과 불경을 일본에 보냈으나 불교가 확산되지 않자 절을 짓기로 한 것으로 생각된다”는 의견은 국내신문에 비중 있게 소개되었다. 이제 왕흥사는 백제 불교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된 듯이 보인다. 앞으로 경주의 황룡사지나 분황사지처럼, 우리 불교와 문화에 관심 있는 사람으로서 부여에 왔다면 꼭 들러볼 만한 유적지로 꼽힐 날도 머지 않은 것 같다.

돌아오는 길 다시 백마강을 건너 능산리로 향했다. 백제대교를 건너며 유장한 백마강을 바라볼 때 일행 중 누군가가 ‘꿈꾸는 백마강’을 콧소리로 부른다. 여기서 이 노래를 들으니 제법 센티멘털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때, 부여는 우리의 정한이 담뿍 서려 있는 백제의 고도인데 이렇게 쉽게 그냥 지나쳐서야 도무지 예의가 아니지 않느냐고, 누군가가 혼잣말처럼 되뇐다.

신대현 / 논설위원ㆍ사찰문화연구원

[불교신문 2422호/ 4월30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