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능산리사지 |
백마강(白馬江)은 부여를 감싸 흐르는 부여의 젖줄과 같은 존재다. 후기 백제의 수도로서 부여가 차지하는 의미가 각별함을 생각할 때, 어머니같이 부여를 보듬어 안았던 백마강의 면모를 되돌아보는 건 단순한 회고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 백마강을 백제대교로 건너면서 자세히 보자니 생각 밖으로 그 힘찬 물줄기의 탄력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발굴된 금동용봉향로는 ‘최상의 백제미술품’ 평가 창왕명사리감은 국가중흥 기원한 사찰성격 보여줘 <사진> 부여 능산리사지 전경. 백제후기 새로운 도약을 꿈꾸던 백제민의 염원을 담은 절이 세워졌다. 부여읍은 백마강 동쪽 기슭에 자리하는데 백마강이 흘러오며 힘들게 쌓아올린 토사가 퇴적되어 이루어진 기름진 평야가 널찍하게 펼쳐진다. 백마강은 물뿐만 아니라 땅까지도 사람들에게 선물하였으니 그 고마움을 어떻게 다 말할까. 부여읍을 비롯해서 규암면, 장암면, 세도면, 양화면 등이 바로 그런 곳으로, 이 자리에 어김없이 고찰들이 들어서 있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평야에서 생산된 미곡은 부여의 풍요를 보장하였고, 나아가 백제 중흥의 웅지를 펼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백마강은 일명 백강(白江, 혹은 帛江)이라고도 한다. 둘 다 강물이 맑고 시원하며 곱기가 마치 비단결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백마강’으로 바뀐 것은 백마로 변한 의자왕을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낚았다 하여 그런 이름이 되었다고 전하지만 물론 신빙성 있는 얘기는 아니다. 그렇지만 견고하게만 여겼던 백제가 신라와 연합한 소정방 군대에 의해 왕궁인 부여의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660년에 막을 내렸으니, 역사적으로 볼 때 부여가 소정방과의 악연이 없는 것도 아니다. 정림사지에 자리한 오층석탑을 일명 ‘평제탑’이라고 부르게 된 것도 역시 소정방의 소행이 아닌가. 왕흥사지를 보고나오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백마강을 건너면서 보니, 멀리 둔치 아래로 소담히 깔린 녹색의 잔디 위에서 한 무리의 초등학생들이 공 차며 놀고 있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이 좋은 봄날 백마강가를 거니는 나그네의 행운을 누리는 스스로를 대견해하며,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볕을 만끽하면서 우리 일행은 능산리사지로 향했다. <사진> 부여 능산리사지 발굴현장 항공사진. 시내에서 동쪽으로 4㎞쯤 가면 능산리고분군(사적 14호)이 있고, 그 주변에 나지막하게 자리한 나성(사적 58호) 사이의 계곡 어간이 바로 절터다. 능산리고분군은 일제강점기 이래로 백제의 왕릉으로서 주목받아 왔고, 근자에는 국사교과서에도 등장할 정도로 유명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능산리사지가 더욱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1993년 금동 향로, 1995년 창왕명 석조사리감 등 백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 미술의 영역에서 보더라도 최고로 손꼽을 만한 미술품들이 잇달아 이곳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때까지는 고분군 주위에 절터가 있다는 것도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못했었다. 그런데 나중에 ‘백제 금동용봉대향로’라는 이름이 붙은 이 향로는 특히 알려지자마자 전 국민들의 시선을 사로잡아버렸다. 그만큼 예술적으로 최상의 경지에 오른 작품이었다. 그런데 이 금동용봉향로는 워낙 조형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세부조각이 뛰어나 불교작품으로서의 존재감은 조명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보다는 오히려 백제에서 유행했던 도교적 가치관과 세계관이 투영된 작품으로만 여겨진 경향이 짙다. 사실 이 향로가 불교적이냐 아니면 도교적이냐 하는 문제는 발견 당시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논란의 한복판에 놓인 난제 중 난제이기도 하다. 도교적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도교에서 말하는 상상 속의 별천지인 삼신산(三神山)을 표현한 것으로 보고 있다. 향로의 인물상 중에서 낚시꾼, 멧돼지를 향해 활을 당기는 사냥꾼 등은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사상과는 다르고, 또 바위 위에서 명상하는 수행자, 머리감는 도인 등이 바로 신선사상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불교적 요소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향로 몸체에 연꽃문양이 있고(연꽃은 불교미술의 감초 격이다), 뚜껑에 장식된 74개의 봉우리는 불교의 성산인 수미산을 표현한 것으로 보았다. 지금에 와서는 도교 쪽으로 무게중심이 옮겨져 있지만, 내 생각에는 어쨌든 향로라는 것 자체가 불교에서 주로 쓰였던 것이니만큼 불교적 영향을 배제하고 보아서는 안 될 것 같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사람들은 이 향로의 화려한 의장에 또 한 번 놀랐었다. 흔히 백제의 미술은 소박하고 은근한 멋이라고 말하곤 했는데, 이 작품은 그와는 달리 맵시 있고 세련된 맛이 철철 넘쳤기 때문이다. 그 같은 혼돈은, 그동안 백제의 미술을 정확하게 짚어내지 못했던 탓이 크다. 은근과 소박함이 백제 미술의 한 특징 중 하나인 건 분명하지만 화려함 역시 백제미술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미의식임을 빼먹은 것이다. 다만 백제 사람들은 화려함을 겉으로 드러내려하지 않고 자세히 살펴보아야만 보이게끔 장치했기 때문에 쉽게 간파하지 못했을 뿐이다. 백제미술의 걸작품을 잘 보면 늘 화려함과 소박함이 한데 어울려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사진> 능산리사지에서 발견된 금동용봉대향로. 백제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걸작이다. 이 향로에 이어서 발견된 석조 사리감은 향로만큼 커다란 대중적 반향을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능산리사지의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상징적 유물이라는 점에서는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비록 사리기는 없고 사리기를 담는 석조 사리감(龕)만 발견된 것이기는 해도, 이 사리감의 형태 자체가 처음 보는 것인 데다가 사리함 겉면에 새겨진 20자의 글자가 사료적 가치가 아주 높기 때문이다. 글은, “백제 창왕 13년 정해년에 매형공주(妹兄公主)가 사리를 공양했다.”는 매우 짧은 내용이다. 창왕은 곧 위덕왕이고, 그의 치세 13년은 567년에 해당한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매형공주가 사리를 봉안했다는 점이다. ‘매형공주’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학자 간 논란이 있지만 백제왕실의 최측근인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 사리감은 백제왕실의 원찰에 봉안된 것이었음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가 있게 된다. 결국 불사리를 봉안한 연대와 공양자가 분명하고, 백제 절터로서는 절의 창건연대가 당시의 유물에 의해 최초로 밝혀진 작품이라는 점, 그리고 이 능산리사지는 바로 백제가 국력을 모아 중흥을 외치던 그 시점에 세워진 점으로 볼 때 가장 중요한 창건목적이 백제 중흥을 기원하는 사찰이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한다면 사리감에 새겨진 글씨들이 백제 역사 연구에 중요한 새로운 금석문으로서 백제와 중국과의 문화교류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라는 점 등은 차라리 덤 정도에 불과했다. <사진> 능산리사지에서 목탑지에서 발견된 창왕명석조사리감. 여기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이곳이 백제왕실의 원찰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오늘은 하루 온종일 좁다란 부여 시내만 왔다 갔다 했다. 하지만 탐방이라는 게 꼭 멀리 다니고 한 번에 많이 보아야 능사는 아니다. 오늘처럼 한 지역에서 의미 있는 곳 몇 군데를 다니면 하루가 온통 즐겁고 보람되게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부여는(경주도 마찬가지지만) 가장 짧은 거리 내에서 가장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해야겠다. 적어도 이쯤 돼야 언필칭 유적도시요, 고도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부여를 다녀와서 이 글을 쓰고 있을 때 한성 도읍기의 백제 절터가 처음으로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백제가 처음 세워진 한강 유역의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안에서 목탑지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굴되었다는 것이다. 이 유적은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최초로 건립된 사찰로 추정된다고도 한다. 그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은 연구가 뒤따라야하겠지만, 적어도 이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앞으로 백제 문화와 불교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이어질 것이라는 점. 다시 말해서 백제불교사를 새로 쓸 만한 자료가 더욱 많이 발견될 가능성은 아주 높다. 우리 일행은 능산리사지를 나와 다시 백마강으로 향했다. 부여의 명물이랄 수 있는 부소산과 고란사(皐蘭寺)를 부여탐방에서 빼놓아서야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신대현 / 논설위원.사찰문화연구원 [불교신문 2424호/ 5월7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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