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112024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백제의 낭만과 亡國 설움 담겨있는 ‘명소’

부여 고란사와 낙화암

지금 부여문화재연구소 건물은 유명한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으로 전에는 박물관으로 쓰였다. 시멘트 건물이어도 지붕이 백제토기의 배 모양을 본떠 날렵하게 곡선을 긋고 있고, 지붕 복판을 둥글게 뚫고 유리로 막아 자연채광을 유도하는 등 1970년대 건축물 중 예술성에서 단연 압권이다. 아마도 좀 더 있으면 문화재로도 지정되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이 부여문화재연구소 건물을 오른쪽으로 두고서 부소산을 오르는 등산로가 있다. 구문매표소에서 출발하여 부소산을 빙 둘러 내려오는 길이다.

지금 우리의 목표인 고란사로만 가려면 구드래나루터 선착장에서 배 타고 들어가는 게 편하겠지만, 이렇게 산을 타고 고란사로 내려가는 길도 놓치기 싫은 코스다. 그만큼 부소산의 등산로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역대 임금 약수 즐겨…침입자 발견 ‘수문장’

의자왕의 3000궁녀 산화했다는 전설 간직



<사진> 고란사. 백제 왕실과 관련되어 창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경주에 남산이 있고 대구에 팔공산이 있다면, 부여에는 부소산이 있다. 산길을 조금 오르다 보면 왼쪽에 서복사(西腹寺)터가 있다. 서복사는 문헌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1980년의 발굴 때 흙으로 빚은 불상과 벽화 편 등 여러 가지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어 백제시대의 고찰임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왕실의 기복사찰이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도 해본다.

부소산에서 아쉬운 게 있다면, 고란사 외에 고찰의 터가 제법 남아 있는데 거의 안내가 되지 않고 있는 점이다. 절터는 절터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니 여기를 조금 손만 보면 지금처럼 단순한 등산코스도 다양하게 개발되는 부수 효과도 기대할 수 있을 텐데.

이번 부여 탐방에는 화가와 작가 친구가 동행했다. 둘 다 직업이 주로 앉아서 하는 일이라 산 오르는 게 버겁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웬걸, 산타기를 나보다 훨씬 잘 한다. 카메라며 노트북 등을 짊어진 나는 오히려 뒤처져서 그들의 뒤통수만 바라보아야 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이들은 건강을 위해 밤마다 조깅과 헬스를 빼놓지 않고 한다고 한다.

광장을 거쳐 한참을 가다가 강변에 세워진 백화정(百花亭) 누각에 올라 잠시 백마강을 내려다보며 쉬었다. 마침 부여의 초등학교 학생들이 소풍 와 좁은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틈을 비집고 겨우 누각에 올라 바라보니 지대가 높아 백마강의 기다란 모습은 잘 보여도 절벽에 가려서 건너편 기슭은 잘 보이지 않는 흠이 있다.

누각을 내려오다가 화가 친구는 끼리끼리 모여 재잘재잘 거리는 아이들에게 한눈을 팔고 걷다가 그만 발목을 접질렸다. 꽤 아픈지 한참을 찡그리던 화가는 다행히 그렇게 심하지는 않아서 절뚝거리기는 해도 걸을만한지 어설프게 발길을 뗀다. 우리는 초등학생들에게나 관심을 갖다니 ‘변태’아니냐고 놀려주었다.

<사진> 고란사. 백마강에 맞닿은 절벽 위에 세워져 있다.

다시 조금 걷다가 어디쯤 왔을까 하며 허리를 펴고 둘레를 바라보니 북쪽 기슭인 왼쪽으로 길이 꺾인다. 이어서 곧바로 백마강 허리 한자락이 시야에 들어오나 싶더니 이내 고란사(皐蘭寺) 마당이 내려다보인다. 그다지 넓지 않은 앞마당에 들어서 우선 법당 앞에 서서 합장을 한 다음 주위를 둘러보았다. 법당 옆으로 요사가 붙어 있고, 법당 오른쪽으로 자그마한 종각이 있다. 그 외로는 법당 뒤 오른쪽으로 근래에 새로 지은 삼성각이 더 있을 뿐이다.

고란사는 이렇게 생각보다 규모가 크지 않은 절이다. 하지만 고대광실 같은 전각은 없어도 고란사에게는 굽이굽이 흐르며 부소산을, 그리고 부여 읍내를 감싸 흐르는 저 백마강이 있어 다른 큰절이 하나도 부러울 성 싶지 않다.

백마강의 굵은 허리를 보러 난간까지 다가갔다. 바로 눈앞에 신기하게도 옛 그림 속에나 나오는 황포돛단배 한 척이 나타나 느릿느릿 지나가가고 있는 게 보인다.

백마강을 가로질러 고란사 앞 선착장까지 오가는 유람선이 정기적으로 다니고 있지만, 또 다른 관광 차원에서 황포돛단배가 관광 한번 야무지게 하자고 마음먹은 승객들을 태운 채 유유히 강가를 지나고 있는 것이다. 유람선을 타고 강 한번 건너는 편도삯이 적잖게 3,000원. 저 황포돛단배는 그보다 훨씬 비싸건만 외지에서 온 관광객들은 낡은 유람선보다는 그 옛날 부여사람들이 된 기분으로 돛배를 더 선호하는 모양이다.

어쨌든 고란사 앞마당에서 내려다보자니 신식의 유람선과 옛 스타일을 한 황포돛단배가 서로 교차하면서 백마강에 잔물결 일으키고 떠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돈 한푼 안 들고 얻은 망외의 장관이었다. ‘변태 화가’ 친구는 어느새 화첩을 펼쳐들고 백마강 스케치에 여념이 없다.

<사진> 백마강을 지나는 황포돛단배. 그 옛날 백제에서도 백마강은 풍요를 가져다주는 젖줄이자 교통의 요충이었을 것이다.

백마강은 낙화암에서 다시 보기로 하고 다시금 경내에 눈을 돌렸다. 법당 뒤쪽은 별로 공간이 많지 않은 채 바로 산자락에 바위 절벽이 붙어 있는데 그 바위 아래에 샘물이 고여 있다.

이게 바로 백제 의자왕이 즐겨 떠먹었다는 바로 그 유명한 고란사 약수다. 이 샘물이 전하는 것처럼 불로장생의 명약이라면 의자왕뿐만 아니라 백제의 여러 임금들이 즐겨 마셨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필 의자왕이 유독 강조된 것은 그가 망국지군(亡國之君)인 탓도 있을 것 같다. 정사는 돌보지 않고 화려함과 방탕만을 좇다 나라를 뺏겨버린 이미지의 의자왕이기에 그의 사치 중 하나로써 고란사 샘물 길어먹기가 그에게 낙인처럼 찍혀버린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뒤집어 말한다면 그만큼 이 고란사 약수는 유명하다. 그리고 이 약수 뒤쪽 암벽에는 고란초가 자생한다. 고란초는 이끼류의 일종으로 제주도에서는 불로초라고 부를 정도로 희귀한 식물이다. 고란사라는 절 이름은 바로 고란초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그래서 전한다.

여기서 고란사의 역사를 떠올려봤다. 고란사는 백제왕들이 노닐기 위해 지은 정자였다는 설도 있고, 왕실 사람들만 가는 이른바 내불전(內佛殿)이었다는 설이 있다고 나와 있다. 헌데 나는 이 두 가지 설이 모두 못마땅하다. 백제왕들이 백마강에서 풍류를 즐기기 위해 지은 정자가 사찰이 되었다는 게 너무 억지처럼 들린다.

불교가 숭상되었던 백제에서 정자를 절로 쓸 리 있겠는가. 또 내불전이라는 소리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다. 비록 여기서 궁이 지척이긴 하지만 굳이 강을 건너와야 하는 이 자리에 하필 내불전을 지을 까닭도 없기 때문이다. 내불전은 글자 그대로 궁궐 안에 있어야 이치에 맞는다. 아마도 백제왕 또는 왕실과의 연관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려다 보니 나온 억측이 아닌가 싶다. 내 생각엔 고란사가 창건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백제의 안위를 위해서였을 거라고 보인다.

백마강은 백제의 젖줄이자 또한 백제의 안보에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고란사는 부여 일대가 두루 조망되니 최고의 망루였을 뿐만 아니라, 수로로 공격하는 적들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 방비를 강구할 천혜의 요새인 부소산의 수문장 역할을 해낸 것이 아닌가 여긴다.

<사진> 서복사지. 부소산 어귀에 자리한 백제 왕실의 기복사찰로, 소조불상, 벽화 편 등이 발견되었다.

고란사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바위절벽이 바로 낙화암이다. 글자 그대로 꽃들이 떨어진 바위, 곧 이른바 백제멸망시 의자왕의 삼천궁녀가 정절을 지키고자 이곳에서 뛰어내려 자결했다는 곳이다.

드라마틱하게 보이기도 하는 이 얘기는 하지만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우선 백제라는 나라에 3,000명이나 되는 궁녀가 있을 턱이 없다. 아마도 의자왕의 패륜을 강조하고자 만들어진 말일 것이다. 역사에서 패자는 사실과 상관없이 항상 오명을 뒤집어쓰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낙화암이 백제 망국의 설움과 회한을 상징하는 존재가 된 사정은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다.

어느새 백마강에 노을이 깃들기 시작했다. 노랗고 붉은 석양이 은색 강줄기에 비추는 모습은 또한 보기 드문 장관이었다. 백마강을 바로 앞에서 내려다보고 있고 낙화암이 지척인 고란사는 과연 부여의 명물이다. 약간 신파조로 말한다면 ‘부여를 찾아온 자, 고란사와 낙화암을 안 가고서 부여를 논하지 말라’라고나 할까.

스케치에 여념이 없는 화가 곁에서 작가 친구는 나지막이 ‘고란사의 밤’을 부른다. 고란사 마당에서 점점 짙은 어둠이 내려앉는 백마강을 바라보며 우리는 그 옛날 백제 사람들도 우리와 같이 이러구서 백마강의 노을을 바라보았겠지 하면서 서로를 쳐다보며 웃었다. 우리가 마치 백제 사람인 것 마냥.

신대현 / 논설위원ㆍ사찰문화연구원


[불교신문 2426호/ 5월14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