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년 전 중국에서 뱃길로 와 법성포로 상륙한 마라난타는 여기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 길지를 찾아내고 불갑사(佛甲寺)를 지었다고 전한다. 백제 불교의 출발은 바로 이 절에서 시작한다. 우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그렇고, 불갑사에 전하는 <고적기>라는 글에도 ‘백제와 신라 중에 처음 세워졌으니 때는 중국 한나라와 위나라 사이다’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해가 서서히 질 무렵, 우리는 느지막이 법성포를 나와 불갑사로 향했다. 그 옛날 마라난타의 발자취를 좇는다고 말하면 거창할 테고, 어쨌든 그 현장에 가보려는 것이다.
1600년 전 중국에서 법성포에 도착해 吉地 찾아
‘고적기’에는 “한나라와 위나라 사이 전해” 기록
<사진> 불갑사 부도밭. 절입구에 있으며, 불갑사에 머물렀던 역대고승의 부도와 비석이 한데 모아져 있다.
영광읍에서 22번 국도로 가다가 삼학리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불갑산 입구’ 표지가 나오고,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불갑사로 들어서게 된다. 가는 길 주변에는 이제 막 모내기가 시작된 논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논보다는 밭이 많고, 그보다는 산이 더 많다.
마을 한복판을 지나 북쪽으로 가니 불갑사 입구라고 쓰인 팻말이 보인다. 여기부터 불갑사 사역이 시작된다. 널찍한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걸으니 왼쪽 야트막한 둔덕 위로 불갑사에 머물렀던 스님들의 부도며 비석들이 열을 지어 서있는 게 보인다. 이른바 부도밭(浮屠田)인데 해인사나 은해사, 직지사, 건봉사 등처럼 부도와 비가 아주 많아 마치 야외박물관을 방불케 하는 곳도 많다.
부도란 스님의 사리탑이니 생전에 그 사찰에서 수행하고 공부했던 자취를 그것으로 떠올려 볼 수 있다. 좀 더 자세한 행적을 알고 싶으면 부도 옆에 세워진 부도비를 읽어보면 된다. 부도비에는 부도의 주인공이 이곳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잘 그려져 있으니까, 말하자면 비석에 새긴 전기(傳記)요 행장(行狀)이랄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부도비에 새겨진 내용이 문헌에 나와 있지 않은 중요한 사료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이렇게 중요하고 의미 있는 부도나 비석들의 가치를 일반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신경 쓴 사찰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비석은 어려운 한문으로 적은데다가 마모도 심해 해석은 고사하고 읽어내려 가는 것조차 어려운 게 대부분이다. 그러니 보통 사람들로서는 비석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다. 이럴 때 비석의 내용을 한글로 풀어쓴 안내판을 세워두면 좋으련만, 그런 친절한 서비스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10여 기의 부도와 비석들이 모여 있는 불갑사 부도밭을 지나자니 문득 이런 단상(斷想)들이 스쳐 지나가는데, 한편으론 ‘여기에 마라난타 존자의 부도나 비석이 있었으면 얼마나 멋질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영광 불갑사 대웅전. 조선 후기의 건축물로 보물830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도밭 뒤쪽으로 자리한 산허리에 널찍한 터가 마련되어 있는데 여기가 불갑사 경내다. 산기슭으로 곧장 올라가면 조실당이고, 그 옆으로 졸졸 흐르는 개울을 사이에 두고 대웅전이며 명부전 등의 법당이 자리하고 있다. 왼쪽으로 난 언덕길로 해서 지그재그를 그리며 슬슬 걸어 올라갈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경내로 들어서는 길은 오른쪽 천왕문으로 난 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제 맛일 것 같아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무로 만든 것 중에는 국내에서 제일 크다고 하는 사천왕이 봉안된 천왕문이 세워진 게 조선시대이니, 이 계단 역시 그 때 쌓았을 것이다. 이 계단을 세어보면 전부 53단으로, <화엄경>에 보이는 것처럼 53명의 선지식을 찾아 길을 떠난 뒤 그들을 차례차례 만나 깨달음을 얻는 선재동자의 구도행각을 상징한다.
불갑사를 찾는 사람들일랑 천왕문으로 가면서 이렇게 쉰셋의 계단을 하나하나 밟고 올라가 부디 선재동자처럼 깨달음을 얻으라는 뜻이다. 계단의 수에까지 이러한 것을 고려하였으니 그 세심한 배려에 감탄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헌데 지금의 계단수는 정확히 쉰 세 개에서 하나 모자란 52개라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경찰서장이 조선사람이 깨달음 얻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일부러 계단 하나를 빼내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하니 기가 찰 뿐이다.
대웅전을 비롯해서 팔상전, 명부전, 만세루, 종루 등의 건물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 중에서 대웅전이 유독 눈길을 잡아끈다. 조선시대 중기에 지은 것으로 지나치게 크거나 화려하지 않으면서 사찰건축의 우아함이 한눈에 들어온다. 게다가 뒷산인 연화봉과 어우러진 그 자태가 무척이나 곱다.
불갑사 대웅전에는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색다른 특징들이 있다. 법당 내부에 석가여래삼존상이 봉안되었는데 이 삼존상이 대웅전 앞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왼쪽에서 오른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 그 중 하나다. 대웅전 앞문으로 들어가면 불상의 오른쪽 면만 보이는 것이다.
<사진> 불갑사 대웅전 삼존불상. 조선 후기 불상으로, 보기 드물게 건물의 오른쪽을 향하게 봉안되어 있다.
이런 불상배치는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대전 고산사 대웅전, 공주 마곡사 대광보전, 양산 통도사 영산전 등에서도 보이지만 아주 드문 편이다. 그런데 불갑사에서는 처음부터 이러했던 것은 아니고, 불갑사에 전해오는 기록에 따르면 19세기에 풍수적인 의도에서 지금처럼 배치를 바꿨다고 한다.
영광을 둘러싼 모악산의 연봉에서 뿜어져 나오는 좋은 기운이 불갑사 뒷산인 연화봉으로 해서 절로 내려오는데 이 힘찬 기운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고 경내에 잘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사찰풍수를 고도의 인문지리학으로 보고, 상당수 사람들은 헛된 망상으로 보기도 한다. 사찰풍수의 가치야 보는 사람 각자에 달린 문제겠지만 근자에 사찰풍수에서 나름대로의 과학성을 찾는 움직임이 제법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는 걸 보면 마냥 외면할 일은 아닌 지도 모른다.
이 대웅전의 또 하나의 특징은 지붕 아래에 있다. 네 면을 돌아가며 역대 선종의 조사들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이런 경우는 불갑사가 유일하니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대웅전 옆에 1355년에 세워진 송광사 16조사 중 한 명인 각진국사 복구스님의 비석이 있는 것도 놓쳐서는 안된다.
10여 년 전 겨울, 전국을 쏘다니던 나는 남도 여행 중 불갑사에 들러서 하루 묵은 적이 있었다. 아마도 보름께였을 게다. 한밤중에 잠을 뒤척이다 답답해 방문을 열었더니 어느새 하얀 눈이 내려와 마당에 가득 쌓이고 있었다.
객방을 나서 마당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가 우연히 대웅전 앞에 서게 되었다. 순간 대웅전 처마 한 가운데가 점점 밝게 빛나는 게 보였다. 이상해서 몇 발자국 뒷걸음 쳐서 쳐다보니 연화봉 위로 둥근 보름달이 막 뜨고 있는 게 아닌가. 처음에는 반만 보이던 황금빛 달은 이윽고 둥근 모습을 다 내보이기 시작했고, 이윽고 대웅전 처마와 연화봉, 그리고 그 위로 솟는 둥근 달이 일직선을 이루었다. 그런 장관이 또 없었다.
지금은 대웅전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어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찬탄하지만, 나는 10여 년 전 이미 그처럼 아름다운 대웅전을 보았었다. 어쩌면 환상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나로 하여금 남도를 떠돌게 하고 밤잠을 설치게 하던 깊은 근심은 그야말로 눈 녹듯 깨끗이 사라져 버리고 잔잔한 희열을 맛보았었다.
불갑사에는 꽃이 잔뜩 핀다. 우선 가을이면 상사화축제를 열 정도로 분홍빛 상사화가 산자락을 가득 물들이는데, 드물게도 노란색 상사화도 핀단다. 경내주변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참식나무군락지도 있다. 그 뿐인가, 대웅전 꽃살문에도 곱게 조각된 연꽃, 국화꽃, 보리수 나무가 가득하다. 꽃 찾아 경내를 서성대는 것도 잔잔한 재미 중 하나다.
백제에 처음 세워진 절이 불갑사인 것은 마라난타의 이야기에서 우선 찾을 수 있지만, 절 이름에서도 그 흔적을 말하곤 한다. 불갑사의 ‘갑’에는 ‘으뜸’, ‘첫 번째’라는 뜻이 있다. 그러니까 불교가 첫 번째로 들어온 절이라는 뜻이 불갑사에 있는 것이다.
지금 이곳에서 마라난타의 유적이나 유물은 남아있지 않지만, 적어도 불갑사라는 이름에서만큼은 그의 자취를 엿볼 수 있으니 작명의 선견지명에 놀라게 된다. 어느새 땅거미가 지고 사위도 어둑어둑해졌다. 마라난타가 이곳에서 처음 지샌 밤은 어떠했을지 문득 궁금해졌는데 그러다 혼자서 씩 웃고 말았다. 끝이 아직 없는데 처음은 따져 무엇할까 싶어서.
신대현/논설위원ㆍ사찰문화연구원
[불교신문 2431호/ 6월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