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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기능 잃고 문화재 명맥만

②경천사 10층석탑

경천사10층석탑은 고려 충목왕4(1358년) 경기도(현재 황해도) 개풍군 광덕면 부소산 자락의 경천사에 조성됐다. 탑 곳곳에는 당시 티베트불교가 유행했던 원나라의 영향을 찾을 수 있다.

3단으로 구성된 기단(基壇)은 4면이 튀어나온 ‘아(亞)자’ 모양이고, 초층에는 용, 사자, 연화무늬가 새겨졌으며, 2층 기단은 중국의 소설인 <서유기> 도상이 새겨져 있다. 3층 기단에는 <본생경>의 내용을 볼 수 있다.

日에 의해 분해 반출…‘수난의 시작’

긴 세월 떠돌다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탑신 역시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亞)자’ 형인데, 총 20면에 삼세불회, 영산회, 법화회 등의 회상이 표현돼 있다. 정사각형의 평면이 시작되는 4층에서는 열반회, 석가회, 지장회 등이 형상화돼 있으며 5층 이상에는 여래상이 조성돼 있다.

뛰어난 조각수법과 함께 4층부터는 각 몸돌마다 난간을 세우고, 지붕돌에 팔작지붕 형태의 기와골을 표현해 놓은 탑은 당시 목조건축의 일면을 알 수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탑에 대한 자료 중 가장 이른 것이 1902년 일본 미술사학자 세키노 타다시가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내부에 봉안된 경천사 10층석탑. 불교신문 자료사진

당시 찍은 사진을 보면 경천사는 석탑만 남은 폐사지였으며, 탑 역시 곳곳이 파손돼 있었다. 세키노 타다시에 의해 탑의 존재가 일본에 알려지면서, 3년 뒤에 탑은 일본으로 반출된다. 1907년 순종의 결혼가례에 일본 측 특사로 참석한 다나카 미쓰야키에 의해서다.

이 같은 내용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간한 <경천사10석탑 보고서>에 비교적 상세히 기록돼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인은 탑 반출을 만류하던 주민 20여명을 총칼로 위협하며 수레로 부재를 옮겼다고 한다. 일본으로 간 탑은 그러나 바로 세워지지 못하고, 제실박물관에 방치된다.

석탑 반출이 알려지면서, 국내 언론에서 잇따라 고발기사를 게재했다. 특히 미국인 헐버트와 영국인 베셀은 언론을 통해 석탑 반환을 촉구했고, 여론이 거세지자 초대 조선총독을 지낸 데라우치도 반환을 요구하고 나서게 된다. 그렇게 해서 제실박물관에 묶여있던 탑은 1918년 11월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하지만 원래 모습은 아니었다. 당시 기술로는 복원이 어려워 부재 그대로 보관될 수밖에 없었던 것. 경복궁 회랑으로 옮겨진 탑은 이듬해 국립박물관에 귀속됐으며, 광복 이후 6.25와 분단을 겪으며 경천사로 돌아가지 못했다.

훼손된 부재에 대한 본격적인 복원작업이 이뤄진 것은 1960년에 이르러서다. 당시 박물관 학예사였던 임천(1908~1965)씨가 탑을 복원, 경복궁 전통공예관 앞에 세웠다. 그리고 지난 1995년 다시 해체됐다. 1960년대에 복원된 부분이 풍화되고 산성비 등으로 오염이 심해 보수가 필요했던 것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옮겨진 145점의 탑부재들은 연구소 이전에 따라 2004년 대전으로 옮겨진다.

마침내 10년이란 긴 시간동안 해체돼 정밀보존처리를 거친 탑이 복원된 곳은 다름 아닌 국립중앙박물관 1층이었다. 당시 박물관은 경복궁에서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실내 1층에 경천사10층탑을 세웠다. 분단으로 인해 돌아갈 수 없는데다가, 복원 당시 3층 탑신부 사리공마저 비워진 경천사10층석탑은 이제 박물관 한켠에서 ‘탑’의 기능을 잃고 문화재의 명맥만을 이어올 뿐이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495호/ 1월24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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