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란 문학.예술.과학.종교.민속.생활양식 등에서 문화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유형, 무형의 소산을 말한다. 이런 문화재의 가치를 평가하는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학술적이나 역사적인 의미이다. 아무리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이라도 오랜 세월 인류와 함께 한 역사가 없다면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현대적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티파니의 보석을 문화재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도 여기 있다.
문화재가 제자리에 있을 때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도 같은 논리다. 신앙의 대상이었던 불상이나 후불탱화가 전각이 아닌 박물관에 보관되면 그 의미가 퇴색되기 마련이다.
日 밀반출 후 돌아왔지만 고향엔 못가
원위치 이전 논의, 훼손 우려 탓 무산
선사의 부도나 탑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본지는 ‘문화재 제자리 찾기’ 코너를 신설, 해외에 반출된 문화재를 비롯해 발굴이나 복원 과정에서 본래 자리를 잃은 문화재를 찾아보고, 이들이 갖는 역사적 의미와 가치 등을 조명, 원래 자리로 돌아 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사진> 경복궁과 고궁박물관 사이에 위치한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은 고려 문종 때 국사를 지낸 해린(海麟, 984∼1067)스님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한 탑이다. 스님이 법천사에서 입적한 직후부터 1085년 사이에 탑과 탑비가 나란히 세워졌다. 각각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탑은 국보 101호로, 비는 국보 59호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지광국사를 기리기 위해 법천사에 세워진 탑과 비가 서로 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현재 탑은 원주 법천사가 아닌 경복궁과 고궁박물관 사이에 세워져 있고, 탑비만 원래 자리를 지키고 있다.
탑은 고려시대 부도탑 가운데 최고로 꼽힐 정도로 예술성이 뛰어나다. 탑의 기단부에는 여러 단을 올려 꽃, 상여, 신선 등으로 장식을 하고, 탑신에는 페르시아풍의 창을 냈으며, 네 모서리가 치켜 올라간 모양의 지붕돌 밑면에는 불보살상과 봉황 등을 조각했다. 이는 지광국사의 장례 당시 사리를 이운하는데 쓰인 외국풍의 화려한 가마를 본 떠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례가 없을 정도로 그 모양이 독특한데다가 아름답고 화려하기로 정평이 나 있지만, 정작 탑의 운명은 기구하기 짝이 없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한 일본인이 법천사 터에서 탑을 이운해와 또 다른 일본인에게 팔면서 탑 이전이 시작됐다. 당시 돈 3만 여원을 주고 탑을 산 일본인은 1912년 오사카로 탑을 밀반출했다. 하지만 데라우치 조선 총독의 반환명령으로 조선으로 돌아오게 된다. 원주에서 일본 오사카를 거쳐 서울로 돌아온 탑의 훼손은 불을 보듯 뻔한 일. 일부 복원돼 조선총독부 앞에 세워지게 됐다.
하지만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포화를 맞은 것이다. 조각난 부재와 파편이 1만 여개에 달했을 정도로 지붕돌 상당부분 파손돼 방치돼 있던 탑은 1957년에야 비로소 복원됐다. 이어 1962년 국보로 지정됐으며, 국립중앙박물관이 보존.관리해오다가, 박물관이 용산으로 옮겨간 후에는 경복궁에서 관리하고 있다. 박물관 이전 당시 원래 있던 법천사로 탑을 이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훼손에 대한 우려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다. 그 바람에 법천사 지광국사 탑과 탑비는 한 스님에서 났지만 이산가족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493호/ 1월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