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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액자에 갇힌 아미타불

④ 동화사 아미타극락회상도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불교회화 코너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불화가 바로 대구 동화사 아미타극락회상도이다. 입구 정면에 위치한 이 불화는 1703년 의균스님이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307.5cm×244cm 크기이며,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관세음보살과 세지보살, 문수·보현·금강장·제장애보살 등 여섯 명의 보살이 서로 짝을 이뤄 둥글게 서 있는 모습이다. 본존불은 상체가 길게 표현됐으며, 뾰족한 육계에 정상계주를 하고 있다. 아미타불 주변은 광배 대신 붉은색과 파란색 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나타냈다. 좌우 협시보살은 붉은색과 녹색을 사용해 법의를 표현했으며, 배경에는 구름무늬를 그려넣어 극락을 묘사했다.

동화사 있던 탱화 국립중앙박물관에

입수 경로 불분명…도난ㆍ매매 추정


하단에 남아있는 화기(畵記)에는 이 불화가 봉안된 곳을 정확하게 표기돼 있지 않고 대신 ‘금당(金堂) 중전(中殿) 미타탱(彌陀幀)’이라고 기록돼 있다.

<사진> 1703년 의균스님이 조성한 동화사 아미타극락회상도. 사진출처=<동화사.은해사의 불교미술>

기존 학설들이 이 불화가 극락전에 봉안됐던 불화로 보는 것과 달리, 정명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의 논문 ‘17세기 후반 동화사 불화승 의균 연구’에서는 이 불화가 처음 봉암됐던 곳을 대구문화재자료 16호인 동화사 수마제전(須摩提殿)으로 추정하고 있다. 수마제는 안락(安樂)이나 극락(極樂)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sukhavati’를 음차한 것이다. 즉 수마제전은 곧 극락전과 다름없다. 1702년(조선 숙종 28)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이 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로, 조선 중.후기 다포양식의 기법과 짜임새가 잘 보존된 건물이다.

17세기를 전후로 의균스님은 여러 장의 불화를 조성하는데, 1699년 동화사 극락전의 아미타회상도를 그린 뒤 4년 후에 또 다시 아미타극락회상도를 완성한다. 이 불화가 수마제전에 봉안됐다는 것이다.

연도별로 살펴보면 동화사는 1622년 극락전을 중창하고 7년 뒤 아미타불을 조성했다. 후불탱화가 완성된 것은 불상이 모셔진 후 70년이나 지난 뒤이며, 3폭의 거대한 아미타회상도를 봉안하게 된다. 이 불화는 지난해 말 보물로 지정예고되기도 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1702년 극락전을 또다시 중건하면서 극락전 뒤편 북쪽에 수마제전을 함께 세운 것이다. 수마제전이 들어선 곳은 금당암의 중앙으로, 화기의 ‘금당 중전’이 이를 지칭함을 유추할 수 있다.

수마제전에 봉안됐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 불화가 어떤 과정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현재 수마제전에 봉안된 후불탱화 1910년에 조성된 것으로 미뤄보아 그 이전에 도난 또는 매매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1940년 경 촬영한 수마제전 유리원판 사진을 보면, 지금의 후불탱화가 봉안돼있는 데다가 동화사가 1970년 사찰 소장 문화재를 신고했을 때 아미타불회도는 목록에서 빠져 있었던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아미타극락회상도가 극락전 후불탱인지 수마제전 후불탱인지 명확한 자료가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이 불화가 동화사에 모셔져 있던 불화인 것만큼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안타까운 것은 탱화를 봉안했던 사찰에 관련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옛날 아미타불을 장엄하기 위해 의균스님이 신심을 갖고 조성했을 아미타극락회상도는 지금 박물관 액자 속에서 그저 보기 좋은 불화로만 여겨질 뿐이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500호/ 2월14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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