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엄(麗嚴, 862~930)은 신라말 고려초의 스님으로 구산선문 중 하나인 성주산문을 개산한 무염스님의 제자이다. 9세에 출가해 당나라의 운거도응선사 밑에서 선종을 수학한 스님은 909년 귀국해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스승을 지냈다. 이후 소백산에서 은거하던 스님은 고려 태조의 요청을 받아 개경과 가까운 양평 보리사의 주지 소임을 맡게됐다. 스님이 입적하자, 태조는 대경(大鏡)이라는 시호와 현기(玄機)라는 탑호를 내렸다고 한다.
보물 361호 보리사대경대사탑비는 여엄스님이 열반한 지 10년 후인 939년(태조2)에 조성됐다. 비문의 내용은 스님의 생애와 공적에 대한 것이 주를 이루며, 뒷면에는 문도들의 이름이 적혔다.
전체높이는 3.5m, 비신높이는 1.76m, 너비는 0.8m, 두께는 0.24m 이다. 비석 받침돌은 거북이가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이며, 머릿돌에는 구름과 용무늬가 조각돼 있다. 그러나 머릿돌에 비해 납작한 받침돌 때문에 조형미가 떨어진다.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의 야외전시장에서 볼 수 있다.
이화여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보물 351호 석조부도는 대경대사의 부도이다. 전형적인 8각탑으로, 조형미와 균형미가 뛰어나다. 기단에는 사자와 구름, 연꽃무늬가, 탑신에는 사천왕상과 보살상이 새겨졌다. 지붕돌 및면에는 비천상과 꽃장식이 조각됐다. 대경대사의 사리탑임에도 단순히 석조부도란 이름을 갖게 된 이유는 서글픈 반출사에 잘 드러나 있다.
<사진> 현기탑비와 석조부도
日업자 반강제 취득 후 ‘부평초’신세
해방 후 일본인 살던 집 마당서 발견
<한국문화재수난사>에 따르면, 당초 보리사탑과 부도는 보리사터 소유자들이 인근 상원사에 기증한 것이다. 그러나 1909년 다카하시란 고물상이 상원사 주지스님과 기증자를 쫓아다니며 탑을 팔라고 협박한 끝에 120원을 주고 사갔다. 다카하시는 이 석탑을 시로로쿠에게 500원을 받고 팔았고, 이후 여러 명의 손을 거치면서 탑의 존재는 잊혀졌다.
그러다 다시 발견된 것은 광복 이후인 1956년이다. 과거 일본인의 집이었던 서울 남산동의 한 주택정원의 한 켠에 석조부도가 모셔져 있었다. 이 부도를 사들인 곳은 이화여대였다. 당시 총리공관을 짓고 있던 이대는 정원조경을 위해 좋은 나무들을 물색하고 있었다. 결국 공관에 조경노릇을 하던 부도는 이후 전문가들의 눈에 띄게 된다. 본격적인 학술조사가 진행된 끝에 탑과 탑신의 모양, 조각수법 등이 현기탑비와 유사해 대경대사의 사리탑으로 결론내려졌다.
부초처럼 떠돌아다니다 보니 훼손을 피할 길이 없었다. 보리사터에서 서울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상륜부가 훼손됐고, 지대석(地臺石)이 떨어져 나갔다. 현재의 지대석은 새로 만든 것이다.
한편, 현기탑비는 부도와는 또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위원 이마니시 류는 1916년 조사보고에서 보리사터에 현기탑비 몸돌과 받침돌, 머릿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상황을 전하고, 경복궁 내 총독부박물관으로의 이운을 주장했다. 조선총독부는 이니마시의 의견을 받아들여 1915년 현기탑비를 서울로 옮겼다.
전국을 떠돌며 하이에나처럼 조선의 문화재를 반출해나가는 일본인들에 의해 본래 모습과 이름, 돌아갈 곳을 잃은 현기탑비와 부도는 씁쓸한 한국의 근현대사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498호/ 2월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