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천왕사① 古來의 사찰터…비룡스님 정진흔적 ‘오롯’ |
사람은 누구나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 한다. 꽉 짜인 일상에서 하루하루를 허우적거리면서 자신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굳게 믿는 현대의 도시인일수록 이런 욕구는 더욱 크다. 떠난다면 멀면 멀수록 좋고, 기왕이면 이국적 멋이 물씬한 섬이라면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요즘은 해외관광이 흔한 일이 된 마당이니 발리 섬은 차라리 진부해졌고, 인도양의 몰디브와 푸껫, 뉴질랜드의 북 섬, 싱가포르의 센타소 섬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 우리의 발길 닿지 않은 섬이 별로 없다. 그러고 보면 우리만큼 여행 좋아하는 민족도 드문 것 같다. 하지만 소박하고 자연풍광 좋은 섬으로 말하자면 우리나라에도 매우 많다. 거문도, 안면도, 선유도 등등 일일이 꼽기가 버겁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누구나 가고 싶고 그곳에 가면 행복할 것 같은 환상 가득한 섬의 ‘원조’는 바로 제주도가 아닐까 싶다. 누구나 오묘한 참선세계로 몰입되는 명당터 ‘근대 제주불교 100년의 현장을 찾아서’. 이번 탐방의 모토는 이렇게 제법 거창하게 잡았다. 올해가 근대 제주에 불교가 자리 잡은 지 100년이니 이를 기념해서 제주도로 떠난 것이다. 지금 ‘제주불교 100년’이라고 말한 것은 제주에 불교가 도입된 시기를 말한 것이 아니다. 불탑사에 고려시대 석탑이 있으니 아무리 양보해도 고려시대에는 이미 불교가 번성하고 있었다. <사진> 제주 천왕사. 최근에 지은 건물임에도 제주의 기후와 특성에 맞는 사찰건축으로 이름이 높다.사진제공=제주불교신문 이병철 기자 서귀포 법화사에서 말하는 것처럼 만일 통일신라 후기의 해상왕 장보고와 법화사를 연결시킨다면 그 시기는 훨씬 앞으로 올라가게 된다. 그런데 갑자기 제주불교 100년이라니, 무슨 소리인가? 제주에서는 18세기 이곳에 목사로 부임한 유교지상주의자 이형상이 사찰 500곳을 강제로 폐사시킨 이래 불교가 질식되어 버렸다. 그러다가 1908년 대흥사의 안봉려관스님이 제주에 와 관음사를 지으면서 제주불교 부흥의 초석을 다졌으니, 나는 이것을 일러 ‘근대 제주불교 100년’이라 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기념해서 현대 제주불교의 특징을 살펴보려는 게 주목적이다. 그건 그렇고, 아무리 탐방이라곤 해도 비행기 타고 제주까지 가는 호사는 쉽게 누릴 수 있는 게 못된다. 하지만 때론 이런 호기라도 부려야 팍팍한 삶을 그런대로 참으며 살아나갈 수 있는 것 아닌가. 비행기는 맹렬한 속도로 활주로를 질주하다 훌쩍 뛰어올라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 속으로 들어섰다. 중력의 법칙이 무색해진 이 순간, 자연의 섭리에서 벗어난 불편함이 갑자기 밀려온다. 하지만 그도 잠깐, 공중에서 한 바퀴 멋진 선회를 그린 비행기가 이내 그 기다란 몸을 남쪽을 향해 쭉 내뻗자 창을 통해 멀찌감치 내려다보이는 대지의 멋진 조감도를 보자니 일상에서 벗어난 해방감에 금세 가슴이 후련해진다. 내 옆자리에는 고건축 전문가 양윤식 박사가 앉아 있다. 명문 S대 건축학과 출신으로 40대 중반인 그는 한국 고건축분야 권위자 중 한 명이다. 며칠 전 우연한 통화 끝에 머리 식힐 겸 제주도나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불쑥 제안했다. 이번 제주행에는 건축부분을 특히 눈여겨 볼 일이 있어서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별 볼일 없이 지내는 나와는 달리 늘 공사다망한 양 박사인지라 이런 갑작스런 제안에 응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괴롭고 찌든 현실에서 탈출하고픈 게 아니라면. “제주도! 아, 좋지요. 당장 가십시다.” 뜻밖의 선선한 대답에 내가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행여 맘이 변할까 서둘러 시간약속을 해두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상에 찌든 도시인이었다. 가벼운 흔들림을 맛보기처럼 보여주고 지면에 무사히 바퀴를 내린 비행기는 격렬한 마찰음과 함께 기다란 활주로를 달리다가 이윽고 멈추어 섰다. 공항 게이트를 나서자 주변에 가득한 야자수 나무들이 이국의 정취를 한껏 돋운다. 6월 하순이기도 했지만, 아열대 기후답게 햇살은 따스했고 바람은 시원했다. 처음으로 온 것도 아니건만 ‘아, 드디어 제주도에 왔구나!’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오며 흥겨워진다. 올 때마다 마치 이번이 처음인 것처럼 마음 설레지는 건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세상 일 다 잊고서 나그네가 되어 섬 곳곳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 굴뚝같지만, 우리는 일단 이곳에 온 목적부터 충실히 수행하기로 했다. 마중 나온 지인의 차에 올라 오후의 따스한 햇살을 뒤로 하고 한라산 천왕사로 향했다. <사진> 제주 관음사에 있는 안봉려관스님의 공덕비. 스님은 해남 대흥사에 있던 중 1908년 제주로 건너와 근대 제주불교 발전의 주춧돌을 놓았다. 우리나라 국도(國道) 가운데 가장 높은 도로는 99번 국도, 일명 ‘1100도로’다. 한라산을 정점에 두고 남제주와 북제주를 잇는 이 도로를 타고 가다 남쪽으로 쭉 뻗은 큰길을 버리고 샛길로 접어들면 해발 700m에서 해발 1000m에 이르기까지 줄지어 형성되어 있는 한라산 아흔아홉 골짜기로 들어선다. 천왕사는 그 중 하나인 금봉곡 하류에 자리한다. 1100도로에 이어서 ‘비의 도로’, 일명 도깨비도로를 어지간히 달려왔다 싶은 순간 주변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길 양쪽으로 빽빽이 들어선 아름드리 전나무숲이 하늘을 가려버린 탓이다. 길도 제법 가팔라진다. 비록 포장된 도로이기는 해도 눈이 쌓이면 다닐 수가 없다고 한다. 한라산으로 깊숙이 들어선 실감이 나기 시작한다. 조금 더 가서 왼쪽으로 난 소로가 천왕사로 올라가는 전용도로다. 천왕사 입구에는 한라산 노루도 이용한다는 약수가 있다. 여기서 바로 옆으로 나 있는 등산로를 오르면 한라산 유일의 폭포라는 선녀폭포도 있다. 그러나 골이 깊고 험하여 오르기 힘든데다가 계곡의 물이 식수원으로 사용되고 있어 지금은 출입이 제한되어 있다. 절 입구에 세워진 명부전을 지나니 천왕사 경내가 시작된다. 천왕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몇 가지 다른 견해가 있는데, 천왕사가 적어도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55년 지금 삼성각 근처 토굴에서 수행하던 비룡스님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 많다. 비룡스님은 처음에는 ‘수영산 선원’으로 시작하였고, 1967년 12월 지금처럼 천왕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비록 드러난 역사는 일천하지만 이곳이 고래의 사찰터임에 이론의 여지가 없으므로 근래에 전통사찰로 지정되었다. 우리가 제주사찰 탐방의 첫걸음으로 천왕사를 향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조금이라도 선근(善根)이 있으면 누구나 오묘한 참선의 세계로 몰입되는 명당터’라는 천왕사의 가람 순력도 탐났지만, 무엇보다도 새로 지은 대웅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제주불교’는 제주불교만의 독특한 특징이 몇 가지 있다. 제주는 뭍이 아니고 섬인 지라 예로부터 이곳만의 풍습과 습속이 이루어져왔던 것인데, 이는 민속학상 그리고 문화인류학상 아주 당연한 현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제주불교를 인식할 때는 일반적인 시각에서가 아니라 제주만의 상황과 환경을 염두에 두고 보아야 제대로 된 제주불교의 참모습을 알 수 있게 된다. 그 같은 제주만의 특수성 중 하나가 사찰건축이다. 제주에는 목조 기와집으로 지은 법당이 많지 않다. 전통 목조건축에 대한 무관심이나 무지여서가 아니라, 기후로 인해 육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상해버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염분 가득 머금은 습기가 사시사철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탓에 목조건축은 지탱해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제주의 명물인 바람이 목조건축에는 치명적 독소인 셈이다. 그런 탓에 육지에서라면 100년을 끄떡없이 버틸 건물도 이곳에서는 몇 년을 제대로 배겨낼 수가 없다. 제주불교를 이야기하면서 전통 목조 법당이 없는 것을 탓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진> 제주 불탑사 오층석탑. 고려시대에 세운 탑으로, 제주에 남은 불교유물로서는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다. 따라서 제주 사찰 중에는 돌과 시멘트로 지은 법당을 많이 보게 된다. 비록 목조는 아닐지라도 모양만큼은 전통 건축양식을 유지하려 하지만 아무래도 이도저도 아닌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런데 지난 5월 낙성된 천왕사 대웅전이 시멘트 건물임에도 목조 가옥 못지않게 전통미를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지형에 맞는 창의성을 발휘했다는 평이 자자했다. 또 하나, 이렇게 지은 법당 안의 닫집 역시 보기 드물게 잘 짠 작품이라는 소식도 함께 들려왔다. 나는 평소 제주불교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소식을 듣자마자 이들을 보기 위한 일정을 잡았던 것이다. 특이하게 절 입구에 자리 잡은 명부전을 지나자 이제 그 천왕사의 대웅전이 눈앞에 나타나려 한다. 신대현 / 논설위원ㆍ사찰문화연구원 [불교신문 2441호/ 7월9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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