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 은행나무에 ‘정삼품’ 내리고 대시주자로 나서<21> 양평 용문사와 파주 용암사 |
그 옛날 세조가 즐겼던 양수리의 아름다운 야경을 우리도 어젯밤 늦게까지 실컷 감상했다. 세조도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우린 야경감상 외에도 향긋한 곡차까지 거나히 곁들인 터라 그만한 흥이 없었다. 그 덕에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침대에서 이불을 끌어안고 “십분만 더, 십분만 더!”를 외치는 친구를 겨우 깨워 아침 일찍 양평으로 향했다. 어제 내린 비로 하늘은 더할 수 없이 깨끗해졌고 아침햇살도 따스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서 내려온 햇살들이 양수리의 고요한 수면 위에 꽂히고 수면 위로는 눈부신 은빛 방울들이 반사되며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다. 마치 강 위에 거대한 비단이 펼쳐져서 흘러내려가는 것 같다. 이런 장관도 보기 어렵다. 아침잠을 날려버렸다고 계속 투덜대던 친구의 불평소리도 어느 사이엔가 잠잠해졌다. 정희왕후, 용문사서 법회 열고 기도해 사리 6과 얻어 용미리석불에 ‘세조 극락왕생 글’ 나와 조성시기 논쟁 한 10여 분 가니 어느새 용문사 입구, 그 유명한 은행나무 ‘정삼품송’이 보인다. 높이 60m가 넘고 수령은 자그마치 1100년으로 추정되어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축에 속한다. 세조가 용문사에 행차할 때 타고 있던 가마 꼭대기가 이 나무 가지에 걸려버리는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때 놀랍게도 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번쩍 들어 올려 가마가 지나가게 길을 터주었다. 세조는 감격해 이 은행나무에 정3품의 직첩을 하사했다. 이 은행나무가 정삼품송으로 불리게 된 내력이다. 재밌는 이야기지만, 그 덕에 세조가 용문사에 행차하였던 ‘사실’이 묻혀버린 감이 없지 않다. <사진>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세조가 용문사에 행차할 때 가마가 지나갈 수 있도록 가지를 치켜들었고, 세조가 정3품을 하사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법주사 정2품송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한다.사진제공=용문사 용문사는 조선시대에 ‘동국 제일의 가람’이라 불릴 만큼 컸다. 그 배경에는 말할 것도 없이 세조의 지원이 절대적이었고 특히 왕비인 정희왕후의 숨은 노력이 컸다. 요즘도 그렇지만 불사에 적극적인 건 남편보다는 아내이지 않은가. 정희왕후는 1428년 수양대군 시절의 세조와 혼인하였다. 이 둘은 여러 모로 닮은 점이 많다. 조카를 없애고 숱한 충신들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서 저승길로 보냈던 세조야 새삼 말할 필요도 없지만, 정희왕후 역시 여간 아니었다. 어쩌면 뚝심과 야심 면에서 세조를 능가할 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이른바 수렴청정을 통해 구중심처 궁궐에서 정치를 한손으로 요리했다. 남편 세조의 사후, 아들 예종이 즉위 1년 2개월 만에 죽고, 또 그 뒤를 이은 덕종 역시 요절하였다. 그러자 세조의 손자이자 덕종의 둘째 아들 성종이 13세로 즉위하였는데 나이가 어려 대비였던 정희왕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그 기간이 그녀가 66세로 죽을 때까지 무려 19년간이나 지속되었다. 남편의 치세까지 합치면 이 부부는 33년간이나 절대권력을 휘두른 셈이다. 이 부부는 합심해서 여러 주요 사찰을 중건 또는 창건하였으니 그들의 불교 사랑은 특기할 만할 것이다. 특히 용문사가 그러한 곳이다. 세조와 정희왕후가 용문사와의 인연은 이러하다. 세조가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인 수양대군 시절 그는 어머니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를 여윈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어머니가 나타나 ‘나를 위해 불상 2위와 보살상 8위를 조성하여 용문사에 모셔라’라고 했다. 계시임을 직감한 그는 당시의 고승 신미와 학조에게 꿈 이야기를 했고, 이들의 권유대로 용문사 중건에 착수하여 1447년 새로 법당을 짓고 불상과 보살상 등을 모셨다. 수양대군은 1년 뒤 부인과 함께 용문사에서 법회를 베풀고 7일간 기도를 하였는데, 6일째 되는 날 밤에 사리 6과를 얻었고, 사리에서 빛이 나와 대낮과 같이 밝아지는 상서로움이 있었다. 이렇게 각별한 인연으로 그는 왕위에 오른 뒤에도 친히 행차하면서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세조가 죽은 후에도 정희왕후는 용문사를 소헌왕후와 세조의 원찰로 삼았다.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했거니와, 그만한 힘이 있었으니 절에 대한 지원은 대단했을 것이다. 사실 세조와 정희왕후 두 부부는 조선시대 중에서도 첫손 꼽히는 호불의 군주로서, 용문사뿐만 아니라 봉선사.회암사.낙산사.오대산 상원사 등에서 많은 불사를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즉 용문사는 세조와 정희왕후 부부의 불교 애호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이라 할 만하다. 용문사를 둘러보고 난 뒤 절 앞에 있는 식당에서 늦은 점심까지 해결했는데도 기다란 여름 해는 아직 서쪽으로 그다지 멀리 가지 않았다. 우리는 내친 김에 또 하나의 세조 유적인 파주 용미리 석불상까지 가 보기로 했다. 일단 고양으로 돌아가서 용미리(광탄) 방면으로 꺾은 다음 용미리 묘지를 지나 파주 방향으로 가면 용암사가 나오는데, 여기에 그 유명한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이 있다. <사진>파주 용미리 석불입상. 우측 불상 하단의 공간에서 200여 자의 글씨가 발견되어, 이 불상과 세조 및 정희왕후와의 관계가 추정되었다. 용암사 경내로 올라가니 석불입상이 높다랗게 우뚝 솟아 있는 게 보인다. 거대한 자연석을 몸통으로 하고 그 위에 머리를 얹어 놓아 반은 자연적으로 반은 인공적으로 조성한 아주 특이한 형태다. 머리 위에는 갓을 쓰고 있는데, 얼마 전 국민대학교의 파주 이전을 축하하기 위해 파주 시민들이 갓 대신 학사모를 씌운 이 두 불상의 모조품을 가마에 태우고 시내를 행진했던 게 기억난다. 그 만큼 이 불상은 파주의 가장 상징적 존재인 셈이다. 사실 머리 위에 갓이 놓인 불상은 미륵부처님의 특징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이 석불입상을 ‘용미리 쌍미륵’이라 불렀으며, 마을이름도 ‘미륵뎅이’가 됐다. 어쨌든 이 불상의 조성연대는 고려라는 것이 정설이고, 고려 13대 임금 선종이 이 석불의 영험으로 후사를 이었다는 관련전설도 전한다. 그런데 이 석불이 세조와 관련 있는가? 10여 년 전, 이 불상에 대한 기사가 신문지면을 크게 장식한 적이 있었다. 불상이 새겨진 바위면의 좁은 공간에 그 동안 몰랐던 200여 자의 글씨가 새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명문(銘文)을 발견한 이는 지금 모 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P선배였다. 1995년 무렵으로 기억된다. 한밤 중 P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낮에 용미리 석불입상 주변에서 명문을 발견하고 탁본에 성공했다면서, 명문을 읽어줄 테니 소감을 말해달라는 것이다. 꽤 놀랐지만, 평소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눈이 밝은데다가 소문 난 수재형인 P선배인지라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하면서 그가 불러주는 한문을 머릿속으로 번역해 보았다. 거기에는 1465년에 해당하는 연호가 나오고, 불상 조성에 참여한 시주자 명단과 함께 세조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글이 있어서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는 이것으로 보아 이 불상은 고려가 아니라 세조 승하 직후에 조성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생각한다 했다. 나는 이 명문의 중요성은 충분히 공감했지만, 좀 더 정밀한 연구 끝에 발표하는 게 낫겠다고 충고했다. 하지만 며칠 뒤 ‘파주 용미리 불상, 조선시대 초에 조성한 것으로 밝혀져’라는 제목의 기사가 조간신문들을 커다랗게 장식한 것이다. 명문에 대한 정밀분석이 다소 부족한 채 성급히 발표되었던 게 ‘옥의 티’이기는 했지만,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명문을 발견한 것은 분명 쾌거였다. 그 뒤 한 동안 이 불상의 조성시기에 대한 격론이 이어졌는데, 아직 확실한 결론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나는 불상이 만들어진 시기가 고려인지 아니면 조선인지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불상의 명문 속에 세조와 정희왕비의 이름이 거론된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불교와 관련된 세조의 행적이 이곳까지 이어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게 보다 의미 있는 일이니까. 어쨌든, 명문에는 비록 정희왕비의 이름만 보이지만, 세조도 한때 여기 왔음은 분명하다. 실이 가는데 바늘이 안 갈 리 있겠나? 그런즉 이곳 역시 세조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으로 보아도 충분한 것이다. 용미리 석불상을 뒤로 하고 나오니 어느새 해는 저물어 사위가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누구의 발자취를 좇는다는 건 묘한 일이다. 그가(혹은 그들이) 갔던 길을 시간을 달리 해서 밟아가다 보면 마치 내 자신이 탐정이라도 된 듯하다. 남의 뒷조사 하는 그런 탐정이 아니라 역사의 이면을 밝혀내는 그런 탐정 말이다. ‘역사 탐정’이라, 그럴 듯 하지 않은가! 신대현 / 논설위원.사찰문화연구원 [불교신문 2437호/ 6월25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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