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105호인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4.8m높이의 탑이다. 기단과 탑의 몸돌은 불법을 수호하는 8부중상(八部衆像)과 보살상으로 장엄이 돼 일명 ‘장식탑’이라고도 불린다. 화려한 외형과 달리 탑은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일반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기단의 네 모서리와 각 면의 가운데는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는데, 아래층 가운데 기둥은 2개씩, 위층은 1개씩이다.
日상인이 무단 반출…원래 모습 잃어
국립박물관 보존 이유, 지하로 사라져
기둥으로 나눠진 위층 기단의 각 면에는 팔부신중이 연화좌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 조각돼 있다. 탑신부 1층의 각 면에도 보살좌상이 새겨졌다. 지붕돌의 밑면 받침은 4단씩 올려져 있으며, 끝의 모서리는 치켜 올려진 모양을 한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탑 모양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륜부가 사라지고 없는 상태며, 탑을 옮길 때 사라진 바닥돌과 기단의 아랫부분을 시멘트로 보강하는 바람에 원래 모습을 잃게 됐다.
이 탑이 원래 세워졌던 곳은 경남 산청으로, 신라시대 때 조성된 사찰인 범허(호)사라는 사찰터이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옛 터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41년 대구의 일본인 골동품 상인이 구입해 공장에 세워놨고, 이후 1947년 경복궁으로 이전돼,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관리하고 있다고 기록돼 있다.
<사진> 경복궁에 세워져 있던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 사진출처=문화재청
1941년 경 이 탑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광석을 캐는 사업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채광을 하다 탑을 발견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팔 것을 권했다. 주민들이 반대하자 당시 돈 100원을 마을 공사비로 내고 탑을 반출해갔고, 탑은 결국 대구의 골동상인인 오쿠 지스케란 사람의 수중에 들어갔다. <석조문화재 그 수난의 역사>에는 보다 상세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탑이 반입됐다는 소식을 접한 일본인 박물관 관계자가 진상조사에 착수했으며, 그 결과 대구 내 한 집의 앞뜰에 해체된 채로 보관돼 있는 것을 확인했다. 또 원래 지역에서 탑을 반출한 사람이 진주에 사는 전정도라는 사실과 그 외에 1명이 탑 반출에 관여했으며, 탑을 산청에서 대구까지 옮기는데 소요된 비용은 모두 오쿠가 지불했다는 것이다.
결국 무단으로 방출돼 대구로 옮겨진 탑은 총독부에 의해 압수됐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산청이 아닌 서울의 총독부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탑이 경복궁으로 이전된 시기는 1942년 4월 이후로 추정되는데, 이전 후 바로 복원되지 못하고 해체된 상태로 방치됐다. 미군정이 들어서고 나서야 공병대의 도움을 받아 탑을 복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탑을 반출하는 과정에서 바닥돌과 기단의 아랫부분을 분실해 영원히 제 모습을 잃게 됐다. 상륜부도 그 때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60여 년 전 경복궁으로 이전된 결과, 현재 탑의 소유 및 관리는 국립중앙박물관이 맡고 있다. 박물관이 경복궁에 있을 때에는 탑을 볼 수 있었지만, 용산으로 이전한 뒤에는 그마저도 쉽지 않게 됐다. 수장고에 보관된 터라, 야외전시실이나 상설전시실에서 탑을 만날 수 없게 된 것이다.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면서 탄생한 탑은 불교에서 부처님을 대신하기도 한다. 그런 사전적인 또는 신앙적인 의미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탑의 수장고 행은 자못 씁쓸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설사 최고의 보존환경을 가진 수장고라 할지라도, 1000년 이상 제자리를 지키며 누군가의 의지처가 돼 주었던 탑의 최종 귀결장소는 박물관 수장고가 아닌 사찰이다. 설사 지금은 사라지고 없더라도 말이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512호/ 3월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