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연지사(蓮沚寺)종은 통일신라 흥덕왕 8년(833)에 조성됐다. 에밀레종이라 불리는 국보 29호 성덕대왕신종, 국보 36호로 지정된 평창 상원사종과 함께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종으로 꼽힌다. 연지사(중안동 옛 배영초교 인근으로 추정)에 봉안됐던 이 종이 일본으로 유출된 것은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 무렵이다. 진주성 함락 이후 약탈된 것으로 보이며, 현재 일본 후쿠이현(福井懸) 쓰루가시(敦賀市) 죠구신사(常官神社) 보물고에 있다. 기록에 따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로 임진왜란 당시 선발대를 독려하기 위해 파견된 밀사 중 한 사람인 오타니 기치류가 1593년 2월29일 죠구신사에 봉납했다고 한다.
희소성 · 양식 변화 · 학술적 가치 높아
‘반환국민행동’ 출범…환수운동 본격화
종의 양식을 살펴보면, 종의 전체 높이는 133.9cm이다. 음통이 22.8cm, 종신의 높이가 111.1cm이며, 입지름이 66.3cm, 종 두께가 6.2cm로 현존하는 일본 내 한국 종 가운데 가장 크다. 종의 꼭대기에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양의 용뉴와 함께 음통이 붙어 있으며, 상판에는 상대와 사다리꼴의 유곽(乳廓)이 있다.
하단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 2개와 2구의 비천상(飛天像)을 조각했다. 비천상은 구름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천의를 날리며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으로 조각됐고, 당좌는 8장의 잎으로 이뤄진 연꽃문양을 새겼다.
<사진> 일본 후쿠이현 쓰루가시 죠구신사에 봉안된 진주 연지사 동종. 사진제공=연지사 종 반환 국민행동
상대와 유곽 사이에는 ‘태화7년3월일청주연지사(太和七年三月日菁州蓮沚寺)’라는 명문이 남아 있다. 여기서 말하는 청주는 진주의 옛 이름으로, 당시 진주성 북쪽에 큰 연못이 있었고, 인근에 연지사라는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연지사 종은 일본이 1953년 국보로 지정할 만큼 문화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현존하는 7개의 통일신라 종 가운데 하나로, 희소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9세기 전반 범종양식을 규명하는데도 중요한 사료다. 앞서 조각된 선림원지종과 실상사종은 종의 몸통부분에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상이 2구가 1조를 유지해온 반면, 연지사종은 1구의 비천상이 단독으로 조각돼 양식상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런 특징 외에도 명문을 통해 833년 무렵의 시대적 상황도 추정할 수 있다. 시주명단을 보면 스님, 촌주와 촌의 유력자, 종을 만든 장인 순으로 기록돼 있어 지배계층과 향민들을 중심이 돼 종을 조성한 것을 알 수 있다. 또 황룡사의 대사가 직접 주도하고, 안해애대사가 주종을 담당했다는 내용과 통일신라 이두표현, 관직명과 승직 등이 남아 있어 당시 제반상황 등을 짐작할 수 있다.
진주시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인 연지사종을 되찾기 위해 현지 진주지역 불교계와 사회문화활동가들은 지난해 12월 ‘연지사 종 반환 국민행동’을 출범하고, 환수운동에 착수, 오는 4월에는 일본 현지답사도 계획하고 있다. 조희래 사무총장은 “수탈되기 전까지 연지사종은 700여년 동안 청아한 범음으로 중생을 위로해왔다”며 “종을 원래 자리에 봉안하는 것은 잃어버린 역사를 바로 아는 일이자 사라진 민족의 정신을 되찾는 일”이라고 밝혔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506호/ 3월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