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백률사는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한국불교 최초의 순교자인 이차돈과 인연이 깊은 사찰이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따르면, 법흥왕은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사찰을 조성하려고 했지만, 토착세력의 반발로 쉽사리 추진하지 못했다. 그러자 법흥왕 14년(527)에 하급관리였던 이차돈이 불교 공인을 위해 순교를 자청하고 나섰다. 그는 죽기 전 “부처님의 가피가 있다면 자신이 죽을 때 이적이 일어날 것”을 예언했다. 날카로운 칼이 그의 목을 베자, 목에서 흰 우유가 솟고 잘린 머리가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는데, 그의 머리가 떨어진 곳이 지금의 백률사 자리라는 것이다.
법흥왕은 이차돈을 처형한 자리에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를 세웠고, 이어 불교 홍포를 위해 순교한 이차돈의 뜻을 기리며 백률사(당시 이름은 자추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경주박물관, 전시 후 돌려놓지 않아
백률사 이전요청, 수락여부 ‘미지수’
이런 역사 때문에 백률사에는 여러 불교유적들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이차돈을 추모하기 위해 헌덕왕10년(818)에 세운 순교비와 국보 28호인 금동약사여래입상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찰에서는 두 성보를 볼 수 없다. 1930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이전된 이후 지금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보로 지정된 금동약사여래입상은 전체 높이 1.77m로 통일신라 최대의 채색 금동불상이다. 둥근 얼굴에 긴 눈썹, 가는 눈, 오똑한 코에 작은 입이 우아하게 표현돼 있으며, 사람의 몸과 비례가 비슷하다. 법의는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가슴에는 U자형 주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두 손이 사라져 온전한 불상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손은 없지만 손목의 위치와 방향으로 미뤄보아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왼손에는 약그릇이나 구슬을 들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 불상은 비례감이 뛰어나고 조형기법이 우수해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 금동아미타여래좌상과 함께 통일신라3대 금동불상으로 꼽힌다.
<사진> 국보 28호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화강암으로 조성된 이차돈 순교비는 높이가 106cm인 사방이 6면으로 표현된 비석이다. 비석의 5면에는 네모칸을 치고 글씨를 새겼는데, 마모가 심해 읽기 어렵다. 나머지 한 면에는 이차돈의 순교장면이 조각돼 있다. 땅이 진동하는 모습은 파도의 물결문양으로 표현했고, 꽃비가 내리는 가운데 잘린 목에서 흰 피가 솟아오르는 장면이 묘사됐다. 이차돈은 양 소매에 손을 넣은 채 있으며 머리에는 고깔 같은 모자를 쓰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저고리에 비교적 풍성한 모양의 바지를 입고 있는 모습이다.
이 두 유적이 사찰을 떠난 때는 1930년이다. 그 이전까지 백률사 대웅전에 봉안돼 있었는데, 경주박물관 전신인 경주고적보존회에서 전시를 위해 옮겨간 뒤 돌려놓지 않았다. 봉안처를 눈 앞에 두고도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다. 특히 금동불입상의 경우 1962년 국보로 지정하면서 소유자를 백률사로 했지만, 소유자의 이전요청이 받아들여질지는 미지수다. 이차돈의 머리가 떨어졌다는 자리에서 순교비를 본 사람과 박물관 유리 너머로 순교비를 본 사람의 감동은 어떻게 다를까. 그저 짐작만 할 다름이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508호/ 3월14일자]